“김영란법, 이 세상을 밝고 맑게 할 소명 있는 자들이 감수해야 할 불편이라니까”

국민일보 2016-08-01
 


나는 마흔하나에 기자가 됐다.
긴 유학생활에서 돌아와 어렵사리 얻은 대학 자리를 털고 나와 전문기자 공채시험을 치른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예비기자들이 흔히 말하는 정의감 사명감 등을 앞세울 정도는 못 됐다. 그저 늦깎이 기자에겐 모든 게 흥미진진했다.

짧은 수습기간 끝에 논설실에 배치됐다. 그곳 선배들은 대부분 오십줄이었는데 가끔 알 듯 모를 듯한 것을 물어왔다. “좋은 시절 다 지난 이 바닥에 뒤늦게 왜 왔나?” 대꾸도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되레 기자질(?)도 모르느냐고 되물었다.

기자질이란 기자입네 하면서 ‘갑질’이나 하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것인데 그런 구악은 이미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행여 그런 상황과 마주치게 되면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충고도 달갑게 들었다. 내가 골프를 치지 않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그렇게 출발한 기자노릇이 지난달 만 18년을 맞았다.

헌법재판소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합헌 결정을 내리자 나의 지난 18년은 혼란에 빠졌다. 취재원들이 제공한 밥자리에 숱하게 나갔고 함께한 기자들 중 까탈을 부리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봉투가 오가거나 밥 한두 끼에 기사가 뒤집어지는 경험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두가 범죄라고 한다.

묵묵히 열심히 일해 온 이들까지 범죄인 취급하겠다는 법안을 합헌으로 판단하는 헌재가 불쾌하기까지 했다. 김영란법은 공직자들의 금품수수 척결을 위해 나왔고 당초 적용대상은 국회·법원, 중앙행정기관, 공공기관, 공직 유관단체, 국공립학교 종사자 등 공직자였는데 법안 처리과정에서 언론인과 사립학교 관계자가 은근슬쩍 추가됐기 때문이다.

소수 권력자들의 일탈에 경계수위를 더 높이면 될 일을 책임질 대상만을 늘리는 건 물타기식 연대책임 추궁의 전형이다. 패전 직후 일본사회에 등장한 ‘1억 총참회론’이 생각난다. 침략전쟁을 결정한 것은 천황과 정부·군부 지도자들이지만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일본 국민 전체가 참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모두의 책임이란 말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과 같다. 지금껏 일본이 과거사 책임에 소홀해 온 배경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김영란법의 적용대상자 수를 대략 400만명으로 꼽는 모양이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제5조 제1항은 부정청탁으로 인해 처벌될 수 있는 주체를 ‘누구든지’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법의 대상은 모든 국민, 즉 5000만명이다. 김영란법은 ‘국민총참회’를 요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헌재가 간과한 것은 아닌가 싶어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단언컨대 법의 취지는 충분히 찬성하며 부패척결의 명제는 두 손 들고 환영한다. 그럼에도 나를 부패의 한 고리로 본다면 이건 정말 아니다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며칠째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차에 받은 지인의 문자 한마디는 큰 위로가 됐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세상이네. 김영란법의 형평을 논하기 전에, 악한 것을 악하다 할 수 있게 된 것은 진전이네. …비록 기자와 교사들이 피해보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을 밝고 맑게 할 소명 있는 자들이 감수해야 할 불편이라고 생각하네.”

그러고 보니 마뜩잖게 느끼는 마음이야말로 오만한 것이었다. 무지한 자신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를 추구함에 비교가 필요 없듯이 때 묻지 않은 순결을 위한 경계와 정진에 형평성 추구가 무슨 까닭이겠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는 말씀이 가슴을 친다. 김영란법도 앞으로 보완이 필요하겠으나, 기자노릇 참 쉽지 않다.

조용래(경제78) 편집인 jubilee@kim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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