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9월 29일
[기고]인권보호 위해 통비법 개정 시급
김성천(법 33) 중앙대 교수·형법
제17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으로 폐기된 많은 법률안 가운데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있었다. 법사위가 마련했던 이 개정안의 핵심내용은 감청설비의 보유와 감청 주체를 분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입법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사기관이 감청장비를 보유해서 운영하면 불법 감청을 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X파일 사건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명백하게 확인했다.
이렇게 감청설비의 보유와 감청 주체를 분리하고 수사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받아오는 때에만 통신회사의 협조를 받아 감청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선진국들이 이미 10여년 전부터 도입, 운영하는 검증된 제도이다. 물론 통신감청은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허용되어 온 합법적인 수사기법이다. 실제로 감청을 이용한 수사를 지금껏 해왔다. 문제는 휴대전화인데 X파일 사건 이후 무선통신 감청장비가 폐기돼 통신사업자의 협조 없이는 감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인권단체 등 반대론자들은 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 많은 논리들을 내세우는데 솔직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우선 통비법이 개정되면 수사기관이 빅브러더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통신감청은 그것을 할 수 있는 대상범죄가 제한돼 있고, 그러한 범죄의 혐의가 확인돼야 하며, 다른 방법으로는 범인 체포나 범죄 입증이 불가능함이 인정돼야만 법원이 허가하게 돼 있다. 국민 모두를 감시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법원에서 감청영장이 발부되면 그 영장에 기재된 특정인의 통화만을 선별해서 전용선을 통해 수사기관에 연결시켜주도록 하는 것이 개정안에 의한 감청 방법이다. 이는 현재 활용되는 유선전화 감청 방법과 똑같다. 통신사업자도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없으며 영장이 발부되지 않으면 어떠한 통화도 어느 누구도 감청할 수가 없다.
사업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감청 장비인 선별장치에 접속하는 모든 사용행위의 로그 기록이 남도록 하고, 동시에 법원 등 제3의 기관에도 실시간으로 같은 내용이 저장되도록 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자체 장비로 감청하는 때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전한 방식이다. 통비법이 개정되면 법원과 통신사업자 그리고 수사기관 모두를 매수하지 않는 한 불법 감청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을 반대론자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빅브러더를 들먹이며 대중의 공포심을 유발하고자 애쓰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사기관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우리나라 수사기관이 보여준 모습은 불신을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의심이 아직도 말끔하게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범죄수사를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범죄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받을 권리 또한 중요한 인권이다. 이 인권은 범죄가 일어나는 족족 범인이 체포돼 응분의 처벌을 받아 범죄가 효과적으로 예방돼야만 지켜질 수 있다. 중요한 수사 방편 가운데 하나인 감청을 하지 말라는 것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말자는 거나 마찬가지다. 법질서와 수사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선진적이며 인권보호에 적합한 방향으로 통신비밀보호법이 조속히 개정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