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순동문(정외9회) 총장출신 교장으로 화제

관리자 | 조회 수 2674 | 2007.06.20. 18:30

"배낭여행 계명고 동아리, 시야 넓히고·취미 살리고"

늦깎이와 문제아들의 학교, 계명고 이달순 교장(전 수원대 총장)

[ 2007-06-20 오전 10:03:42 ]

대학총장 출신의 고등학교 교장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송자 전 연세대 총장은 은평 뉴타운의 한 자립형 사립고의 교장이 된다고 하는 얘기도 있고요, 박성수 전 전주대 총장은 서울 명지고등학교의 교장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달순 전 수원대학교 총장은 좀 특이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수원 계명고등학교 교장 일을 하고 계신데요,

이 고등학교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늦깎이 학생이라든가 정규 고등학교 입시 탈락자나 중퇴자들이 찾아오는 학교입니다. 이른바 문제아들의 학교라는 말도 듣는 학교입니다.

학생들이 즐거워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이 학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매달 유명인들을 초청해 젊은 시절의 인생 이야기를 해주고세계 여행 테마반을 만들어 각국의 문화를 스스로 공부하게 하고 스스로 진정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뭔가를 찾게 합니다.

이달순 교장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 선생님의 맏아들이기도 한데요.그가 살아온 삶을 6월 18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야 “참교육자 둔재교육론”

▶ 1936년생이시면 칠순이신데 굉장히 건강해 보이세요. 건강 비결이 있으신가요?

그건 별로 없고요, 다만 정년퇴직 후에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아직도 일주일에 3일은 수원대학교에서 강의를 합니다. 그리고 계명고등학교에 가서 선생님, 학생들과 함께 씨름도 하고요. 또 집이 수원대학교에서 가까운데, 라비돌이라는 유료양로원이 있어요. 그곳에 나인 홀 골프장이 있어서 수시로 골프를 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 하루의 일과는 어떻게 되세요?

보통 7시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라비돌 식당으로 가요. 호텔 뷔페식이라서 서양 사람들도 오고 여행객들도 오는 곳인데 즐겁게 아침을 먹지요. 우리들끼리는 라비돌 리조트라고도 하고 노인휴게소, 요양소라고도 합니다. 어떤 날은 계명고등학교에 먼저 가고 어떤 날은 수원대학교에 먼저 가기도 하면서 두 군데를 왔다 갔다 하는데, 차로 가면 수원대학교는 라비돌에서 5분 거리에 있고 계명고등학교는 30분 거리에 있습니다.

▶ 대학교 총장에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가시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송자 전 연세대 총장님이 은평 뉴타운의 한 자립형 사립고의 교장으고 가신다고 그러고, 박성수 전 전주대 총장님은 서울 명지고등학교의 교장이 되셨어요. 또 이돈희 전 교육부 장관께서는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장으로 가셨네요. 요즘 유행인가요?(웃음)

또 이택희 교육대학총장이 한영외국어고등학교 교장으로 갔고요. 그게 요즘 유행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다른 분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계명고등학교에 와 달라고 했을 때 처음에 안 간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이 자칫하면 우리나라를 망가트릴 수 있는 교육제도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교육에서 무조건 대학만 보내려는 풍토는 없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회에 진출하고 전공과목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는, 교육학자는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중앙대학교에 있을 때도 그런 면에서 학생들과 교육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고. 그런데 계명고등학교가 이런 학교라는 얘기를 듣고는 그럼 한 번 가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취임사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앙대학교 20년, 수원대학교 20년, 도합 40년 동안을 대학 교수로 생활했으니까 다들 교육계에 40년을 종사했다고 말하는데, 저는 제가 교육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교육자 노릇을 한 게 없잖아요. 대학교수는 지식의 전달자인데 정말 교육계에 40년을 있었다고 하면 교육자 노릇을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항상 있었는데 마침 계명고등학교가 이런 특수학교인데 여기 와서 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교육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겠구나 해서 왔습니다.”취임식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정말 그런 심정입니다.

▶ 취임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8월이 되면 2년이 됩니다.

▶ 김현옥 전 서울시장님도 부산의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가셔서 뵌 적이 있는데 굉장히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외국에도 그런 경우가 있나요?

그런 제도를 조금씩 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있는데 제가 일본이나 미국에 갈 때 실제로 한 번 가보려고 해요. 왜냐하면 우리 학교가 두 가지 특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일반학생들이 일반 고등학교에서 탈락한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좋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은 틀에 박힌 교육에 싫증이 나서 물러난 학생들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타고난 재주가 있는데 우리나라 교육은 무턱대고 수능고사 몇 개에 밤 열시까지 밀어붙이니까 거기에 취미가 안 맞아서 나온 것은 당연하다. 잘 왔다. 우리는 그런 너희들에 대해서 재미있게 시야를 넓히고 취미를 살리고 끼를 살려주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학교생활을 해라.”또 하나는 불우하게 배움의 적령기를 놓쳐서 나이 4,50이 되었는데, 사위나 며느리는 다 대학을 나왔는데 명색이 어머니가 학교를 못 나왔다고 하면 되겠는가, 고등학교는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분들은 더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소위 성인반은 일반 고등학교처럼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고 대학을 들어가려는 거죠. 이렇게 두 가지를 겸하고 있는 학교니까 한쪽은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시키고 또 한쪽은 다양한 교육을 시키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지금 계명고등학교의 교육방침을 끌고나가는 것처럼 전국의 고등학교가 이런 식으로 변화되면 우리나라 교육이 제대로 되는 거다, 그래서 교육 혁명은 계명고등학교에서부터 일으키자는 조금 외람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지구촌 누비는 '배낭여행 계명고 동아리’

▶ 계명고등학교가 요즘 말하는 대안학교와는 다른 거죠?

요즘 추세가 틀에 박힌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에 진력이 나서 불평하고 학교 가기 싫어하다 보니까 오히려 하고 싶어 하는 쪽이 잘 된대요. 저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을 해요.그런데 우리는 정식 인문고등학교거든요. 대안고등학교처럼 그런 걸 할 수 없으니까 오전에는 정규교육을 시키고 오후에는 요일별로 진학, 진로, 기독교, 불교, 유교, 가톨릭, 인성교육, 스포츠, 봉사활동 등을 합니다. 그리고 취임 후 1년 있다가 금년부터 시작한 게 뭐냐면 지구촌을 누비는 ‘배낭여행 계명고등학교 동아리’를 만들어서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미국, 호주 등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님들에게 우리 학교에 와서 무료특강을 하라고 해서 동아리들을 지도하고 계신 거예요.

제가 생각할 때 아이들이 정식 고등학교에서 자꾸 틀에 박힌 고등학교에서 밀려나는데 여러 가지 교양교육과 끼를 길러주더라도 어학만큼은 잘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들한테 너무 좁게 수능시험 과목만 가지고 교육을 시키니까, 시야도 넓혀줘야 하고 상식도 넓혀줘야 해요. 그래서 전교 학생의 동아리를 8개로 쪼갰어요. 그래서 그 교수님들이 와서 가르치는 건 어학위주로 가르치지 않고 내가 프랑스에서 20년 동안 대학교수 생활하느라고 공부했는데 프랑스에 가면 이러이러한 먹을거리, 구경거리, 작품, 연극 피가로의 결혼 등을 이야기하면서 극장을 가야하지 않겠냐, 그러면 극장을 뭐라고 하느냐, 지하철을 타려면 표를 사야하는데 표를 뭐라고 하냐 등등 이렇게 해서 조금씩 취미를 붙여서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영어공부, 외국어 공부라는 것은 시험을 위한 거잖아요. 이건 네가 앞으로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직장에 가면 이제는 젊은이들이 배낭여행하는 시대가 왔고 지구촌을 누비는 시대가 왔는데 그때를 위해서 지금부터 대비하는 거라고 하면 욕망이 생길 것이라는 거죠. 동기부여를 해 주고 어느 정도 하다 보면 마지막 공부는 자기가 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제 추측입니다. 학생들이 재미있어 하죠.그래서 아이들이 교수님들이 우리학교에 와서 그런 강의도 했다고 하면 그게 선전이 돼서 다른 학생들이 자꾸 우리 학교에 와요. 계명고등학교에 하도 많이 온다고 하니까 수원일대에 비상이 걸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웃음)

▶ 말씀하셨듯이 계명고등학교는 정기 인문고등학교잖아요. 틀에서 벗어난 교육을 해도 무방한가요? 교육인적자원부의 제약을 받는다든지 그런 일은 없으신가요?

우리나라 교육의 비리인데 입시위주의 교육을 시키는 일반 고등학교들은 정상적으로 하느냐? 여기에 미술, 음악, 체육 등을 줄여서 입시위주로 교육을 하잖아요. 우리학교 같은 경우는 교육감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구두로 동의는 얻었어요. “틀에 박힌 교육에서 밀려나온 아이들인데 똑같은 교육을 시키면 우리학교의 존재가 왜 필요하겠느냐고, 그래서 우리는 이러이러한 교육으로 아이들의 취미와 시야를 넓혀주고 끼를 살려주겠다.”고 했더니 하시라고 해서 구두 동의는 받았어요.

▶ 학생이 몇 명이나 되나요?

지금 현재도 수시로 들어와요. 왜냐하면 학교에서 “너, 안되겠다. 네가 있으면 우리 반이 잘 나가고 있는데 대학입시 공부하는데 거치적거린다. 딴 데로 가라.”고 해서 우리학교에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1년 내내 받을 수밖에 없지요.

▶ 그래도 정원이 있겠지요?

정원이야 있기는 있지만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늘 들어와요. 현재 630여 명인데 교감 선생님 말씀으로는 제가 학교에 왔을 때가 2년 전이니까 그때는 340명이었다고 해요. 2배가 불어난 거죠.

▶ 수시로 들어와도 받아주시나요?

물론 엄격하게 심사는 합니다. 하지만 탈락해서 오는 학생들을 받아주려고 만든 학교인데 이게 나쁘고 저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죠. 경기도에 이런 학교가 9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인문고등학교는 우리학교밖에 없어요. 다른 학교는 직업학교잖아요. 실업학교다, 정보통신학교라고 하는데 인문고등학교는 우리학교밖에 없어요.그래서 저는 경기도에서, 어떤 의미로는 수원에서 마지막으로 발전시켜야 할 학교다, 이건 나 혼자 책임을 질 것이 아니라 수원시와 온 경기도 도민들이 굉장히 중요한 사명을 가진 거예요. 여기에서 탈락하면 아이들이 정말로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거잖아요. 이것을 좀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교육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이 방송을 듣고 그래서 중요한 거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 그렇게 해서 들어왔는데 여기에서도 도저히 적응 못하고 나가는 아이들도 있어요?

있죠. 있는데 그 사람들은 학교를 안 다니다가 다른데 갈 데가 없으니까 또 돌아와요. 집에서 공부는 해야 한다고 하고 또 본인도 나가서 공장에 있든지, 부랑자로 있든지, 사회 일반인으로 있다 보면 나이가 좀 먹잖아요. 그러면 저희들이 하는 야간이나 주간에 성인반, 평생교육반이라고 하는데 거기로 들어오면 나이 20살 먹어서 우리학교에 또 들어오더라고요.

◇ 늦깎이 학구열의 백미(白眉), 평생교육반

▶ 평생교육반은 따로 만드신 거예요?

따로 클래스가 있습니다. 지금도 주간, 야간이 있어요.

▶ 제일 연세가 많으신 학생이 몇 살이세요?

작년에 63세 되시는 분이 졸업하시면서 대학을 가셨어요.

▶ 그곳도 3년제인가요?

2년입니다. 왜냐하면 나이 많으신 분들이 대학 가려고 하시는 거니까 빨리 졸업을 시켜야 하는데 정규 수업 수는 채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2년 동안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단축하는 거죠. 여름방학 일주일, 겨울방학 일주일, 1년에 보름, 이렇게 수업 일수를 채웁니다.

▶ 선생님들이 방학 때도 나와서 가르치셔야 되겠네요.

돌아가면서 나오죠. 그 반을 위해서요.(웃음)

▶ 선생님들은 몇 분이나 되세요?

현재 18명입니다.

▶ 그 선생님들이 평생교육반도 가르치시고 일반 학생들도 가르치시나요?

제가 정부에다 이야기를 한 적도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나쁘게 이야기해서 고등학교에서 대학 보내는 교육을 시키는 학교는 제가 생각할 때 학교 선생님의 노력보다 학부형들의 노력이 그 학생의 진학에 크게 플러스가 되고 있다, 물론 선생님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예를 들어 지금 기독교방송국 옆에 양정고등학교가 있잖아요. 제가 양정고등학교 동창회장을 했을 때 서울 만리동에 있었는데 그때는 아이들 성적이 굉장히 나빴어요. 그러다가 목동으로 이사를 왔으니 아이들 성적이 나쁘면 안 된다고 동창회장 입장에서 누누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걱정할 게 없는 게, 목동에 좋은 학부형들이 있으니까 아이들 성적이 서울대학교 1등부터 시작해서 진학률이 보통 좋은 게 아니에요. 선생님도 똑같고 시설도 똑같고 이사만 왔는데. 그랬다는 이야기는 결국 학부형들이 공부를 시킨다는 말이에요.하지만 아이들이 정상교육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는 학부형들이 아이들에 대해서 열성이 없는 거예요. 물론 살림에 쪼들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결손가정 등 가정이 풍요롭지 못하고 단란하지 못하니까 그런 데서 아이들이 삐뚤어지고 공부도 안하게 되는 거죠.그런 아이들을 인성교육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다시 하게하고 그 아이의 취미가 무엇인지 그쪽으로 살려주고...지금은 간단하게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려면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보람은 느낍니다. 연고대 가고 명문대를 갔다는 자랑은 있지만 학원이든 학부형들의 노력이 절반 이상이든 우리는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을 선생님들이 해야 하니까 무척 힘든 거예요.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이 이 방송을 듣고 도와주었으면 하는 이유가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지금 선생님들에 대한 정부의 인건비 지원이 1인당 한 달에 150만원이에요. 그런데 우리학교는 70만원입니다. 경기도 교육감한테 올려달라고 했더니 2만원 올려줘서 72만원이 되었는데 서울의 다른 곳은 69만원이래요. 지방자치제가 잘 안되어 있어서 돈이 부족한 곳은 그것도 덜 준답니다. 그리고 우리학교 학급당 할당된 선생님의 TO 비율을 저쪽은 후하게 주고 우리는 박해요. 결국 우리 선생님들은 시간은 더 많이 쓰고 봉급은 적죠. 그러니까 이런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의 낙오자가 되지 않고 이곳에서 다시 살려주는 건데 이런 아이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나와요. 이렇게 좋은 제도를 만들어 놓고 등한시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뭐든지 1류, 1류 하잖아요. 3류, 4류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 평생교육반 학생 중에 인상에 남는 분들 몇 분 소개해 주세요.

사실은 이 방송이 끝나면 PD나 손숙 선생님에게 그 분들을 출연 좀 시켜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려던 참이었어요.(웃음) 우리들은 졸업식 때 학교에서 생활했던 것을 에세이 형식으로 낭독하는 시간이 있어요. 성인반 대표로 그 분이 했는데 너무 감동을 주었다고 해서 학부형 중에서 신문에 칼럼을 쓴 사람도 있고, 그 자리에서 본인도 울고 선생님도 울고 학생들도 울었습니다. 그 분이 나한테 상을 받았는데 어떤 상인가 하면, 직업은 확실히 모르는데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는 중에 틈틈이 노인정에 가서 한글을 가르쳤대요. 한글을 가르치니까 노인정에서 얼마를 거둬서 돈을 준 모양이에요. 안 받겠다는데 자꾸 돈을 주니까 받아서 모았어요. 그 모은 돈을 가지고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내주셔서 장학금 수여식을 했어요. 그 분이 졸업을 하고 사이버대학교에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학부형 회의를 하는데 학부형으로 오셨어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더니 아들을 우리학교에 넣었대요. 그 아들이 자기 머리 좀 기르고 싶은데 엄마가 계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이 두발자유화니까 그 학교에 가겠다고 해서 그래, 개성이니까 네가 다른 학교에 가면 머리를 자르라고 할 테니 머리를 기르라고 학교에 넣어놓고 자기는 학부형의 임원이 되었어요.본인이 다니면서 학생들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았겠죠. 말은 두발자유화이지만 그것뿐이겠어요? 여러 가지 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고 결정한 거죠.사실은 더 알고 싶은 건, 남의 사생활이라 좀 그렇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노인정에 가고 또 그 돈을 모아서 장학금을 주고 아들을 다니던 학교에 입학시키고...한 번 방송국에 출연시켰으면 좋겠어요.(웃음)

▶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그 분은 거의 50이 넘었을 겁니다.또 그중에는 남자분인데 개인택시 운전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분이 꼭 자동차를 대놓고 시간이 끝나면 가고, 개인택시니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모양이에요. 또 어떤 분은 상업을 하는 남자분인데 그렇게 열심히 할 수가 없어요. 60이 넘으신 분인데 이번에 대학에 가셨어요.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대학은 4년제 대학은 가기가 어려운데, 지금 저희들이 애쓰는 것 중에 진로를 찾기 위해서 여러 사회인들을 모십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이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장을 쥐고 어디를 갈지 모르는 아이들이 많잖아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제 취미를 찾아서 진로교육을 시키니까 어디를 가겠다는 게 결정이 되면, 요즘은 2년제 대학의 학과들이 특수하잖아요. 그래서 그 과를 가서 2년제를 졸업하면 어디로 취직이 될 수 있겠다는 게 연결이 되죠. 그래서 2년제를 전부 가는데 학교에서 견학, 체험활동을 많이 하면 성적으로 가니까 그 분들이 우리학교를 와요. 그러면 저는 다른 학교에 가면 대학교수들이 와서 우리학교에 좋은 학생 좀 보내달라고 하면 알겠다고 하고 가라고 하는데, 저는 그 학교의 전체 선생님들이 오셔서 홍보 비디오도 틀어주고 학과의 특색도 이야기해 주고, 말하자면 그것이 진학교육뿐만 아니라 진로교육까지도 되니까요.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좋아서 그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을 불러다가 자기네 학교 구경도 시켜주고 실컷 뛰어놀다가 식사도 대접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꼭 대학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다 합격을 해요. 작년에도 200명이 졸업을 했는데 100명은 다 대학에 갔습니다.

▶ 평생교육반을 다니는 분들과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열의가 다를 것 같아요.

그 분들은 정말 공부 못한 한이 맺혀서 학교에 일찍 오고 늦게까지 자습합니다.

▶ 배낭여행 동아리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지금 실천하고 있나요?

지금 하고 있습니다. 8개 반으로 정해서 우리학교 선생님들이 다 맡고 그것을 지도할 대학교수님들을 연결시킨 거죠. 대학교수가 고등학교 동아리의 지도교수에요.(웃음)

▶ 그럼 교수님들이 동아리를 데리고 가는 건가요?

아닙니다. 졸업하고 가기 위한 공부를 시키는 겁니다. 미리 공부를 시키는 건데 역사, 문화, 지리, 현재의 유적 등을 자세히 알려줘서 내가 거기를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죠. 그게 그 나라의 역사, 문화, 지리를 다 배우는 거니까 교육 중에서도 산교육이죠. 그래서 그 나라에 가려면 어학을 해야 한다고 조금씩 동기부여를 해서 어학까지 시키고 있습니다.

▶ 영국 같은 곳은 대학을 들어가면 1년 동안 유예기간을 둔다고 해요. 그래서 본인이 가고 싶은 곳, 미국이든 한국이든 원하는 곳에 가서 1년 동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결과물을 갖고 오라고 한대요. 이런 제도는 굉장히 좋은 제도 같아요.

체험활동인데 우리는 외국까지 가는 것은 어렵고 3년 만에 한 번씩 졸업여행으로 해서 전교생을 데리고 해외에 가는 것은 있는데 자비니까 못 가는 학생들도 많아요. 대신에 국내는 저희들이 연극, 영화 등 수원에서 KBS 스튜디오가 가까우니까 돌아가면서 보고 삼성전자, 삼성전기도 있으니까 체험활동을 많이 보냅니다. 그래서 전람회나 전시회를 많이 구경하도록 도와주고 있어요.

◇ 여기자 1세대, 어머니의 빛나는 개화열전

▶ 어머님이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선생님이신데, 올해 5월 10일이 최은희상 24회째죠? 이 상이 돌아가시고 시작이 된 거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돈 5천만 원을 내 놓으시고 이걸 기금으로 해서 ‘최은희 여기자상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는데, 제 1회 시상식 때 누워계셔서 못 나오셨어요. 제가 비디오로 만들어 드렸는데 그것만 보셨죠. 그리고 돌아가셨어요.

▶ 몇 남매신가요?

3남매입니다. 제가 첫 째고 밑으로 여동생이 둘 있습니다.

▶ 어머님 이야기를 조금 더 해주세요. 84년도에 돌아가셨나요?

예, 84년도에 돌아가셨어요.

▶ 어머님이 평소에 어떤 분이셨어요?

홀어머니에 제가 외아들이고 여동생 둘이 있으니까 살림하시기가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3남매를 다 대학까지 보내서 박사 만들고 교수 만드는 것까지 하셨으니까 힘드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 아버님은 몇 살 때 돌아가셨어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아버지 손잡고 화신백화점에 가서 만두를 먹었던 기억만 나요. 그 다음에는 없어서 몰라요.(웃음)

▶ 이달순 교장선생님이 철들 무렵부터 어머님이 여기자셨나요?

아닙니다. 어머니는 1924년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7년 동안 하시다가 해방 전에 그만두신 거죠. 재미있는 것은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친구들이 나서서 어머니가 경기여고 때 독립운동을 해서 옥고를 치르셨기 때문에 독립훈장을 드리자고 신청을 하라고 해서 제가 했는데 거절당했어요. 일제시대 때 기자를 했으면 친일파지, 어떻게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게 이유였어요.그런데 어머니가 자서전에서 “남편이 완고해서 기자생활 그만큼 했으면 됐지, 가정에서 아이들 잘 키우라고 해서 가정에만 묻혀있었기 때문에 친일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친일을 했다고 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반공연습을 하는데 젊고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당시에는 양동이에 물을 떠서 농구대에 같은 곳에 물을 많이 받으면 1등이에요. 동 대항으로 열린 시합에서 지휘관을 하라고 해서 했는데 우리 동네가 1등을 했대요. 그래서 1등 상을 받았다. 그리고 가계부를 만들라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여자는 가계부도 못 쓰나 하고 흉을 잡힐까봐 가계부를 열심히 만들었더니 또 1등을 하셨대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한테 상을 받은 게 2개다. 그걸 가지고 나를 친일파라고 한다면 수긍하겠다.”그래서 심사위원들한테 가서 그 책을 보여줬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구나 해서 어머니한테 훈장이 나왔습니다.(웃음)

어머니가 한 가지 특색이 있는 게, 지금은 오히려 여자들이 많이 시험에 붙어서 남자들을 누르는 사회가 되었는데 당시에는 여자들을 잘 안 썼잖아요. 제가 지금 기억하기에 해방이 되서 옛날 조선일보에 있던 안재홍씨 같은 사람들이 민정장관도 하고 그러니까 막 쫓아다니면서 초등학교 교장부터 여자를 내야 한다고 해서 오정화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을 교동초등학교의 교장을 시킨 게 여자 최초의 교장입니다. 우리나라 해방 이후 여자로서는요.그 다음에 우리 어머니가 경기여고를 나오셨으니까 경기여고 졸업생을 교장으로 시켜야 한다고 해서 손정규라고 사대 교수하시던 분을 시켰어요. 그리고 제주도의 교육감을 여자를 시켜야 한다고 막 써서 다니시고, 그러니까 여자를 어디든지 밀어줘서 사회에 진출하게 만드는데 무지하게 노력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삼남매라고 하셨는데 집에서는 어머님이 아들, 딸 구별을 전혀 안하셨어요?

그런 건 없고 집안일은 서로 돕자고 가훈이 되어 있어서, 저는 장작 패고 물 길어오고 여동생 하나는 밥하고 또 하나는 솥 청소하고 그랬습니다.(웃음)

▶ 아들이라고 특별대접을 받거나 하지는 않으셨어요?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제가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친구들까지 집안일이 있으면 와서 도와줄 정도가 돼서 저도 초등학교 때 효자상도 받았어요.(웃음)

▶ 초등학교 때 효자상을 받으셨다고요?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어머니를 돌본다고 해서 받은 상이죠.

▶ 그 시절에는 어머님들이 신식교육을 받으셨어도 남자가 하는 일이라고 구분을 짓는 분들이 많았어요.

당시에 꼭대기 집에 살았는데 수도가 안 나왔어요. 거기에 우물물을 떠와야 하고 수돗물을 뜨려면 20개 되는 층계를 물지게를 지고 내려와야 해요. 그걸 여동생이 할 수 없으니까 제가 하죠. 그리고 어머니는 장작이나 쌀을 1년분을 갖다 놓기 때문에 장작을 제가 쪼갰죠. 여동생들은 그런 걸 못하잖아요. 대신 여동생들이 다른 일을 갈라서 해서 집안일은 서로 돕고 명랑하게 살자, 또 자기 일은 자기가 하자는 게 가훈이었어요.(웃음)

◇ 떼인 돈 받아낸 배짱 “너, 기자해라!”

▶ 혹시 잘못해서 매를 맞거나 하신 기억은 없으세요?

어머니가 화를 내신 적이 있어요. 제가 다 커서 중앙대학교 조교를 하면서 상명여고의 야간강사를 나갔어요. 낮에는 중앙대학교 조교로 근무하고 저녁 때 가르쳤는데 선배들이라고 하면서 찾아왔어요. 그 불쌍한 교감, 선생들을 왜 내쫓으려고 하느냐고 다 양정 선배들이니까 그러지 말라고 그래요.그런데 그때가 4.19 때가 되서 이사장, 교장이 숨어 다니던 상황인데 제가 무슨 데모주동자처럼 되어버린 거예요.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이 우리 어머니와 굉장히 가까우셨는데 그분한테 가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신봉조 교장이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하니까 학교에서 무슨 일을 했기에 학교에서 말썽이 나서 너 때문에 벌벌 떠느냐고 말이죠. 그래서 책을 집어던지시고 그런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지금은 양정고등학교가 목동에 와 있습니다만 학생들이 중앙대학교를 들어오면 이달순이 학생회장도 했으니까 이달순 선배가 있다고 해서 늘 찾아와요. 찾아와서 신입생 환영회를 해 주다 보면 중국집에서 빼갈을 하나 놓고 자장면을 먹는데 매년 들어오는 놈마다 누구누구 때문에 양정학교를 간다고 매번 그래서 한번은 좋다고 그랬더니 이놈들이 하루는 지프차를 빌려와서 같이 학교를 가자고 해서 양정고등학교 만리재를 올라갔더니 학생들이 한 200명이 모여 있어요. 내가오니까 박수를 치고 난리에요. 그때 홍일식 총장이 양정고등학교 총장인데 내가 가니까 잘 오셨다고, 학교가 이렇게 잘못되고 있으니까 자기는 학교에 있고 저는 바깥에 있고 대학에 있으니까 시정 좀 해달라고 그러더라고요.그런데 거기에 경찰 출입하는 사람이 삼각지에 내가 나가는 학교에 출입하면서 저 사람이 양정고등학교 데모 주동자라고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걸로 화난 것 이외에는 별로 화는 내신 적이 없고 매를 드신 적도 없으셨어요.

▶ 어머니가 최은희 기자이시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어요?

제가 중앙대학교를 간 것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어머니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편이니까 임영신 총장이 선거를 하는데 어머니가 그걸 자진해서 했어요. 그러니까 여자 국민당 당수가 임영신 총장인데 거기에 부당수 겸 서울시 당수 겸 문화선전부장이었어요. 그래서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당신 아들은 다 책임지겠다고 해서 중앙대학교를 갔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데 갈 생각을 안 했어요. 어머니가 혼자 고생하시니까. 그래도 딸들은 어머니께서 고생해서 번 돈으로 악착같이 외국을 갔어요.(웃음) 그럴 때 임영신 총장이 사람들한테 최은희씨 아들이시죠? 하면 아냐, 컸으니까 이달순 어머니가 최은희야 그러셨어요.

최은희 여기자 상이라고 하는 게 사실은 어머니가 5천만 원밖에 안내놓으셨으니까 상금 몇 번 주고 25년인데 그 돈이 남아났겠어요? 상금은 처음에 300만원을 하다가 10년째 되는 해에 500만원으로 늘렸다가 금년부터 조선일보에서 천만 원을 내놔요. 그동안 조선일보가 하나도 안했거든요. 제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최은희 문화사업회를 만들고 거기서 상금을 주고 파티도 하고 부상도 주고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조선일보 방일영 문화재단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천만 원을 내놨으니까 올해 타시는 분들은 천만 원을 타시는 거예요. 제 부담이 훨씬 줄었죠.

▶ 어머니께서 춘원 이광수 선생님의 부인과 친하셨다고 하는데요, 이광수 선생님의 부인이 떼인 돈을 받아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동경여자대학교를 다니시다가 여름방학이라서 잠시 나왔는데, 여학생들이 훌륭한 문인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나 봐요. 이광수 선생님의 부인이 산부인과 의사인데, 부잣집 며느리한테 외상값을 떼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 가서 담판을 짓고 돈을 받아왔대요. 그랬더니 이광수 선생님이 너는 동경으로 다시 가서 공부하지 말고 기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조선일보 기자가 되신 거래요.

▶ 이달순 교장선생님의 외가가 잘 사시는 편이셨나요?

어머니 친정은 황해도에서 구한말에 큰 감투를 쓰셨던 모양이에요. 어머니가 경기여고 학생이셨으니까 3월 1일에 기숙사 학생들을 데리고 파고다 공원으로 갔는데, 어머니의 자서전에는 ‘그날 경기여고밖에는 여학생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적혀있어요.그래서 경기여고 학생들을 잡았다가 다 내보내고 두 학생만 남겨졌는데 주동자 중 한 사람이 어머니였어요. 일단 거기서 조서를 받고 방면이 되었는데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가서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또 했단 말이죠. 그래서 체포되어서 두 곳에서 만세운동을 했다고 해서 가중치가 붙은 거예요. 6개월 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셨죠.

▶ 외가에 대한 기억은 없으세요?

이모부가 송홍국 목사라고 한국전쟁 때 해군본부 정훈감을 지내시고 신학대학 학장을 하시고 신학대학의 기숙사 사감도 하시고 감리교의 요한웨슬리를 번역한 책이 많이 있어요. 이모와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보내는 걸 보면 외할아버지 댁이 잘 사신 거죠.

◇ 노랑투피스, 제비로 뽑은 천생연분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31살 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결혼을 늦게 했어요.임영신 총장님이 어머니 때문에 장학생으로 저를 데려다 놓으셨어요. 서울대나 연고대를 못갔다 하더라도 중앙대학교를 연고대처럼, 사립학교니까 좋은 학교로 만드는데 힘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젊었을 때 마음에 연고대라는 것이 그 당시 중앙대학교도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있어요. 사립학교법 사학 반대 투쟁하던 교수들도 많이 와 있고 또 이승만 박사가 도와줘서 미국 돈으로 도서관도 짓고 학교가 참 좋단 말이에요.그런데 연고전이라는 스포츠 행사만 했다 하면 세상이 시끄러워요. 그래서 제가 그걸 깨트리자고 했더니, 학교의 간부들이나 교수들이나 학생들이나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축구부를 만들어서 연고대를 깨트리고 3년 연속 축구부 연승을 시켰어요. 그래놓고 축구부 선생에게 맡겨놓고 또 농구부를 만들었어요. 농구부가 유명한 기아에서 활동을 해서 기아가 전국의 최고 농구팀이 되었는데 우리 중앙대학교의 학생들을 모조리 보내서 된 거니까 중앙대학교의 농구를 우승시키는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요.

▶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옛날에는 결혼식 할 때 주례사 이외에 축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제가 친구 대표 축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 자리에서 축사를 하면서 그랬어요. “우리 옛날 속담에 헌신짝도 짝이 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다들 무슨 소리냐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저 신랑신부가 언제 헌신짝이 되어버렸냐는 거죠.“신랑은 사이클을 통해서 아시안게임에서 일본 하늘 높이 태극기를 날렸고 신부는 탁구를 통해서 쇼트 게임을 잘 한다는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아시아의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신랑과 신부는 손발이 제대로 맞는 짝입니다.”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이 웃더라고요. 그런데 저쪽 멀리서 보니까 긴 머리카락의 여인과 노란 투피스의 여인이 강단 맨 뒤쪽에 서 있어요. 처음 단 위에 서니까 눈 마주칠 사람이 없어서 목표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얼굴을 쳐다보면서 했어요. 그러면서 저 두 사람 중에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랑 쪽은 아니고 신부 쪽이니까 신부가 결혼식 하고 온 다음에 만나기로 하는데 당시 신혼여행으로 온양온천이 최고의 신혼 여행지였어요. 그래서 서울역에 마중을 나갔는데 중앙대학교의 후배들도 같이 나왔어요. 마침 시간이 연착이 되서 대우빌딩 앞에 역마차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앉아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권영태라고 유명한 시인이자 문화원협의회 회장으로 있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럼 고르지 말고 하나씩 나눠 갖자고 해서 다방 도우미한테 메모지를 갖다 달라고 해서 하나는 긴 머리카락, 또 하나는 노란 투피스를 써서 제비를 뽑았는데 저한테는 노란 투피스가 걸린 거예요. 그게 지금 제 마누라입니다.(웃음) 아내도 알고 있는 얘기고 그런데 그 친구는 성공을 못했어요.

▶ 경기도지사에 출마도 하셨어요.

제가 정치학과를 간 것은 정치를 하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군사혁명이 나서 군사독재시절이 되니까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거절했어요. 그리고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시대가 왔는데 가만히 보니까 민주투쟁하면서 고생한 분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이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 정계에서 일도 하고 풍요롭게 살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민주투쟁 못한 사람이 정계에 나가는 것이 미안해서 또 안 나갔어요. 하지만 마냥 그렇게만 있을 수가 없어서 경기도지사를 결심을 했어요.당시 경기도에서 나오는 신문이 있는데 돈을 안 받고 일주일에 글을 두 번을 썼습니다. 한 번은 칼럼이니까 사진이 나가고 한 번은 사설이니까 이름 없이 나가고. 선거 때가 되니까 책 한 권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책 출판기념회에서 내가 도지사 입후보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냐 하면 선거라는 것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거니까 경선을 할 것이다, 경선은 내가 경기도에 있으면서 경기도에 5,6개의 분과자문위원회가 있는데 자문위원 위원장을 5,6개를 했거든요. 특히 국정홍보위원장이라는 것은 경기도 일대에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경선 나왔다고 하면 어느 정당에서 “거긴, 어떻게 됐어?” “경선에서는 누가 인기야?”지금처럼 여론조사가 없을 때니까 그렇게 되면 그때 나를 아는 사람들이 도지사 나오고 싶냐? 그렇게 해서 연결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정치학을 배웠으면서도 정 반대로 생각한 거예요. 임창렬씨가 딱 지명되어서 내려왔대요. 무슨 민주정치에 경선도 안 하고 내려오느냐고 했더니 정치라는 게 그렇더라고요.(웃음) 거기서 단념했는데 그때 이인제씨가 당을 만들어서 모든 걸 다 대줄테니 가자, 자기가 대통령에 입후보해서 개인연설이나 TV연설에 돈이 없어서 못한 게 있는데 그것까지 대주겠다고 해서 갔더니 국회위원이고 당 사람들이고 환호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연설을 하고 다니고 그랬는데 이인제 위원이 대학 강의처럼 길게 하지 말고 축사는 짧게 하십시오 해서 짧게 했더니 1분도 안 돼서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메모가 와서는 더 길게 하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그런 정도로 인기를 끌었어요.(웃음)그런데 끝에 가서 등록비를 못 마련하더라고요.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제 3당은 안 돼요. 결국 예선에만 참석을 한 셈이고 도지사 후보라고 해서 각 지구당에만 다니다가 본선은 못 치른 거죠.

◇ 가족사의 ‘최초 도전기’는 어머니로부터!

▶ 자제분은 어떻게 되세요?

2남 1녀입니다.제가 경기도 여성단체 심사위원장도 하고 중앙대학교에 있다가 수원대학교에 왔는데, 벌써 25년 전이니까 그 당시에는 경기도에 좋은 대학이나 좋은 교수들이 없었는지 교장회의, 교무주임회의부터 시작해서 시청, 도청 공무원들한테 강연을 하라고 해서 다녔는데 특히 여성단체를 많이 다녔어요. 어머니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그런데 그 당시에 100만 여성을 포용하고 있다는 20개의 경기도 여성단체가 협의회를 만들었어요. 그게 10주년이 되었는데 매번 남자 뒤만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남자를 하나 불러들여서 상도 주자고 해서 경기도 남성상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투표를 했는데 제가 당선이 되었어요.1,2층에 2천명이 가득 찼는데 경기 남성상이라는 것을 받고 답사를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우리나라의 최초의 여자 신문기자라는 것을 안 여동생이 나도 어머니처럼 최초의 여성이 되겠다고 하더니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농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작은 여동생이 나도 어머니처럼, 언니처럼 최초의 여성이 되겠다고 하더니 중국 최초의 여자박사가 되었습니다. 여자 셋에 남자는 저 혼자인데 여자 셋은 최초가 있는데 저만 없어서 고개 숙인 남자가 되었는데 노벨상보다 더 귀한 여성단체가 남성상을 주셔서 최초의 수상자가 되었으니 나도 최초가 되었습니다.”그랬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잖아요.

그런데 우리 집에 박사 아닌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마누라입니다. 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가난한 학자 집에 시집와서 보따리 장사부터 시작을 하더니 우리 가정이 중류생활에 크게 뒤지지 않는 가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식들이 박사면 뭐하고 최초면 뭐하냐, 우리 가정을 엄마가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까 우리 엄마에게 명예박사를 주자는 거예요. 그래서 명예박사면 무슨 박사를 줄래, 물어봤더니 바가지 박사를 준대요.(웃음) 친구들이 저한테 와서 너는 바가지 박사하고 사니까 공처가라고 해요.친구들이 우리 집을 보니까 방 안에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져야 나라가 밝아진다.”여동생이 국문학을 하고 지금 이대교수로 있는데 한글로 전부 써서 붙여놨어요. 그걸 보더니 너는 아주 여자 밑에서 푹 파묻혀서 산다고 별명을 진처가로 바꾼대요. 진처가가 뭐냐고 했더니 너는 여자만 보면 벌벌 떨게 생겨서, 떨 진자를 써서 진처가라고 하더라고요.

▶ 계명고등학교 교장실에도 그렇게 써놓으시지요.(웃음)

그래서 중앙대학교에서는 임영신 총장님이 제 상관인데 이 분이 기분 좋을 때는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시다가 화가 나면 결재서류 팽개치고 야단을 치신단 말이에요. 너는 집에서도 여자한테 쩔쩔 매고 직장이라고 와도 여자한테 쩔쩔매고 별명을 바꿔야 한대요. 그래서 거기서 경처가가 되었습니다. 여자 말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란다고 놀랄 경자를 써서요.제가 폴란드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선수단 단장을 하러 갔었어요. 눈 속을 헤매고 얼음판을 깨트려서 메달을 5개를 따 왔더니 대통령 훈장을 주더라고요. 올림픽 선수들이 저한테 별명을 붙여줬는데 헬처가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내 말만 들어도 헬렐레 한다고 헬처가라고 하더라고요. 가부장제 하에서 가정의 평등과 여성 중심을 생각하면서 그걸 보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저작권자 ⓒ CBS 노컷뉴스 (www.nocut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