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경제78) 칼럼] 가려졌던 희망 드러낼 수는 없을까

“봄꽃 이면에 가려진 참담함과 그리고 다시 그 안에 숨어 있는 희망을 찾아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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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이 지났다. 꽃샘추위를 뚫고 봄꽃들이 넘친다. 그렇지만 마음은 무겁다. 큰 잔치 끝에 오는 허전함만은 아니다. 고난·부활이 한 묶음임을 잘 알지만 유독 올 부활절엔 의심이 앞섰다. 불안하다. 고난의 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까.

희망의 재료들이 사라지고 있다. 정치는 몇 달째 공천을 둘러싼 진흙탕싸움을 이어갔다. 한쪽에서는 친박 진박 비박 탈박 등 마치 우주가 박심(朴心)을 축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설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애꿎은 호남을 서로 끌어안겠다며 주도권을 다투고 파당을 갈랐다. 극단적인 정치혐오증만을 국민에게 다시 떠안기고 말았다.

경제는 회복이 더딘 세계경제 탓이 크다지만 소득은 안 늘고 일자리는 여전히 부족하다. 당국은 문제군(群)을 앞세울 뿐 관련 법규 신설·개정에 뒷전인 정치권만 탓한다. 법규만 정비되면 세상이 새로 열릴 듯 주장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되레 불안감만 커지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도 희망은 실종상태다. 부모가 자식들을 죽음으로 밀어넣는 엽기적인 소식이 난무한다. 약자들을 꼼꼼하게 감싸주지 못한 제도 탓도 있겠으나 인면수심의 참담함이 우리 사회에 그만큼 만연돼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울한 한국사회의 단면은 준비되지 않은 장수사회에서 거듭 드러난다.

여기에 한반도의 분단 구조는 매우 극단적이고 일촉즉발의 모습이다. 북한은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끝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남한을 윽박지른다. 미·중은 오히려 대화를 거론하기에 이르렀지만 한국은 해법 부재로 엉거주춤한 태도다. 미욱한 형제들의 저급한 다툼을 보는 듯 마음이 아프다. 이렇듯 우리의 미래는 일찌감치 희뿌옇게 빛바래고 있다.

과연 희망은 없는 걸까. 부활의 희망이 텍스트 속에서나 있을 법한 막연한 것으로만 보이는 지금 실존적 희망은 정말 불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에 끊임없이 고민한 이가 있었다. 감추어진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 신앙인에게 부여된 임무라고 말하는 이, 그는 바로 반세기 전 출간된 ‘희망의 신학’(1964)을 통해 평생토록 희망적 종말론을 펴온 조직신학자, 독일 튀빙겐 대학 명예교수 위르겐 몰트만이다.

몰트만은 지난 22일 서울신대가 주최한 국제 학술대회 강연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아적 희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고난을 짊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75년 첫 방한 이래 수없이 한국을 드나들면서 이 땅의 정치적 고난에 대해서도 희망의 바람을 불어넣으며 동참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는 희망론을 설파했다.

그는 2003년 내놓은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을 통해 만연된 위기적 상황 속에서 힘없고 가난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희망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끝 안에 새로운 출발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지 않는 증거”라고 그는 후렴구를 부르듯 반복적으로 말한다.

문제는 숨겨져 있는 희망을 어떻게 찾아내서 우리의 몫으로 인식할 것인가에 달렸다. 표피를 걷어내고 가려져 있던 희망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방이 어둠으로 덮였는데 빛이 있다고 주장하기란, 모든 사람들이 포기하고 지쳐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지금 경험하는 참담한 종결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노교수의 제언에 귀 기울이자. 봄꽃 이면에 가려진 참담함을 읽어내고 그리고 다시 그 안에 깊이 숨어 있는 희망을 찾아내는 일에 종교인들, 특히 크리스천들이 매달려보자. 누구든 희망세례를 받을 때 행복한 미래가 열릴 것이다. 봄날 희망을 곱씹어 본다.

조용래(경제78)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