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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개헌안이 논의에 불을 지피는 데 기여하는 건 좋지만 헌법은 무릇 시대정신에 부합해야 한다
헌법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묶어두는 데 그 존재 목적이 있다


이 나라는 대통령들의 무덤인가. 11명의 전임 대통령 중 무탈하게 임기를 마치고 자연사한 사람은 김영삼과 김대중뿐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 후 망명했고 윤보선은 군부 쿠데타로 밀려났다. 박정희는 부하에게 암살됐고 최규하는 8개월 만에 신군부의 압력으로 물러났다.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구속 수감됐으며 노무현은 자살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유일한 나라의 현대사가 실은 영욕의 대통령 수난사에 다름 아니다. 원인 중 하나로 과도한 권력집중이 꼽힌다. 권력구조 개편은 헌법을 바꿔야 가능하다. 이에 우선 국회가 2016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직후 개헌특위를 만들었다. 그 즈음 들불처럼 번지던 촛불시위에서도 주요 의제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 방안으로 개헌이 제기됐다.

포스트 탄핵시대가 개헌으로 열리는 듯했다. 개헌, 즉 6공화국 헌법의 폐기는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7개월이나 앞당겨진 작년 5월 대선에서 모든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세웠다. 개헌 국민투표 일정까지도 오는 6월 실시될 지방선거에 맞추자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대선이 끝나자 개헌이슈는 정치권에서 슬그머니 밀려나고 말았다.

사그라진 개헌의 불씨를 다시 지펴내려는 듯 문재인정부는 26일 오늘, 자체적으로 만든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미 청와대는 지난주 세 차례에 걸쳐 개헌안을 공개하고 설명함으로써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촛불시민의 열망에 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는 문 정권으로서는 공약을 관철한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을 터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 헌법학자들도 정부 개헌안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적지 않다. 정부 개헌안의 골자는 대통령 4년 연임제, 지방분권 강화, 선명한 토지공개념 규정, 국민소환제·국민발안제 도입 등이다. 문제는 이런 대응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극복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촛불민심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미흡해 보인다.

두 번 다시 불행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을 쪼개야 한다. 분산된 권력들이 서로 소통하며 협치를 통해 나라가 작동되도록 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회가, 특히 야당이 개헌에 소극적이기에 정부가 개헌 분위기를 다시 엮어내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되나 개헌안의 내용은 무릇 시대정신에 부합해야 한다.

정부안은 국무총리를 비롯해 4대 권력기관인 검찰총장 국정원장 국세청장 경찰청장에 대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기존 틀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법원장, 감사원장, 헌법재판소장 등과의 관계 또한 대통령 우위의 틀은 여전하다. 감사원 독립을 말하지만 9명의 감사위원 선임권을 나눠 갖는 정도로는 이전과 다를 바 없다.

87년 헌법의 시대정신은 대통령 직선제와 장기집권 금지에 있었다. 그전까지 아홉 번이나 개헌이 있었지만 지난 30년 동안 6공화국 헌법이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국민 대부분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탄핵사태를 겪으면서 시민들은 87체제의 극복 필요성을 절감했다.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본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바로 분권이요, 협치와 소통이다. 촛불민심의 주장도 다르지 않았다. 헌법을 다시 챙겨야 한다. 헌법은 최상위의 법률이기에 중요한 게 아니다. 법률은 한 나라의 입법기관이 만들어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초점이 있지만 헌법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묶어두는 데 그 존재 목적이 있다.

새 시대는 국가권력의 일탈을 막기 위한 장치를 제대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입헌주의의 핵심은 국가의 권력행사를 헌법에 근거해 제한하는 데 있는 만큼 앞으로 등장할 제7공화국 헌법은 권력의 분산과 이를 기반으로 한 협치·소통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마땅하다.

정부가 불을 지핀 개헌 논의에 정치권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임했으면 좋겠다. 정부안에 대한 비판을 위한 비판만 퍼붓고 있어서는 자신들이 가장 우려하는 국민들로부터의 외면을 피하기 어렵다. 비판과 더불어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수정안을 내놓거나 충분한 토론을 통해 최종적으로 제3의 개헌안이 나오기를 희망한다. 물론 최종안의 골자는 분권·협치라야 한다.

국회가 꼭 제몫을 해주기 바란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합의와 공감대 없이는 실행되기 어렵다. 대통령들의 무덤인 나라라는 조롱에서는 적어도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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