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4년 2월 중앙대학교 홍보대사 중앙사랑 인터뷰 '파워중앙인'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양금용 선배님을 만났다.
 
IMI 전경련 국제경영원 CEO포럼팀 팀장을 거쳐 현재 SM C&C 여행사업부문 MICE사업부 이사로 재직하고 있기에 정장 차림의 중후한 느낌을 주는 남성을 연상했지만,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겉보기에 그의 모습은 여느 대학생과 다름없었다. 특히 직장인에게선 느끼기 어려운 자유분방함이 뿜어져 나왔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 선배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나를 던지셨다.
 
“과녁을 10번 쏴서 다 만점 받는 방법 아세요?”
답변을 하려고 고심하는 우리에게 웃으면서 그가 말했다.
 
“쏜 그 자리에 과녁을 그리는 겁니다. 남이 정해놓은 과녁에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자신의 인생의 과녁을 남에게 맡기면 안 됩니다. 자 시작하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진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자전거 하나만으로 미 대륙을 횡단한 남자는 다르다”
 
 
● 즐거움과 도전의 학창시절 ●
 
1. 선배님의 대학생활은 어떠하셨는지?(연애, 동아리활동, 교내외활동 등)
 
- 지금 대학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대학생활은 (어우~) 즐거움 그 자체였죠. 대학시절 생각하면 친구들과 같이 놀고 잔디밭에서 술도 많이 먹고, 연못에서 기타도 치고 아주 정말 잘 놀았습니다. 통영에서 올라오니까 당연히 남들 다가는 OT는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당시에도 경영학과는 200명이 넘어서 친구들을 잘 몰랐어요. 하지만 재미있게 생활하고 싶어서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던 경험을 살려 과대표를 했습니다. 당시 과대표를 하기 위해선 동기들의 추천을 받아야 했어요. 통영 촌놈이 무슨 연고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저는 저를 추천했습니다.
 
- 과대표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어요. 요즘 대학생들처럼 대외활동을 하지는 않았어요. 대신 경영대 축제에서 드럼을 맡아서 공연도 하고, 총장배 농구대회에서 응원단장으로 활동했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일을 좋아했거든요.
 
- 연애도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했는데...(웃음)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에게 어떤 여자가 주목해 주겠어요. 2학년 때 평소 관심 있는 과 동기한테 고백했다가 보기 좋게 차였습니다. 당시에는 CC(Campus Couple)를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어요.
 
아, 참고로 말하자면 그 당시 저를 거부했던 동기는 지금 제 아침밥을 차려주고 있어요. 졸업 후에 다시 만나서 사랑을 쟁취했습니다.
 
 
2. 대학생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 사람마다 살면서 몇 번의 터닝포인트를 맞는다고 생각해요. 제 첫 번째 터닝포인트는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아픈 몸 때문에 군대를 면제받고 앞날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뭘 해야 하나...그러던 중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누나가 뉴욕으로 놀러 오라고 하더군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바로 휴학하고 뉴욕으로 날아갔습니다.
 
- 도착 후 두 달간 버스로 미국 전역을 쭉 돌고 뉴욕에 왔는데, 누나가 없어졌어요. 알고 보니 누나는 비자 갱신을 위해 통영에 가 있는 상태였어요. 여행 중에 연락하지 않아 일어난 대참사였어요.
 
-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남아서 혼자 뉴욕에서 생존할 것인가. 당시 젊은 패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다시 전화를 걸어 뉴욕에 혼자 남겠다고 부모님께 말했어요.
 
일단 주머니에 돈이 100불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갔어요. 사정사정해서 주변 경비를 서는 대가로 잠자리를 마련했고, 맨해튼 전역을 일주일간 걸으며 지리를 익혔습니다. 이후 바이크메신저(퀵서비스)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이 일을 하면서 조금씩 영어를 배웠고 이후 여행사에서 사무보조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비즈니스 영어를 습득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저에게 영어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공부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이렇게 뉴욕에서 습득한 실전 영어는 제가 전경련에 들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 지금의 ‘양금용’이 되기까지 ●
 
1. 졸업 후 들어가신 전경련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나요?
 
- 2000년 졸업 후 전경련 입사한 이후로 주로 CEO 컨퍼런스와 세계지식포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의 기획, 구성, 운영 등의 일들을 도맡아 했어요. 초창기에는 코카콜라, IBM, 3M 등 다국적 기업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포럼을 기획하여 인적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지요.
 
 
2. 전경련에서 국제경영원 CEO포럼팀 팀장으로 있으셨는데 어떠한 계기로 SM C&C로 이직하신건지 궁금합니다.
 
- 전경련에서 일하면서 대한민국의 수많은 기업인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곳에서 다양한 회의와 컨퍼런스를 관리하면서 기업인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가 생기면 먼저 추천해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인맥을 넓혀가던 중 SM C&C의 송경애 사장을 알게 되었고, 그분이 제게 같이 사업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어요. 원래 문화산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리고 SM Ent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컨텐츠에 제가 가진 인맥이 더해진다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고심 끝에 SM C&C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지요.
 
 
3. SM의 경우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선배님께서는 SM C&C에서 특히 여행사업부문 MICE사업부 이사로 재직 중이신데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신가요?
 
- 예 맞아요. SM의 경우 사람들이 엔터테인먼트를 주력으로 하는 회사로 많이들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SM C&C는 엔터테인먼트산업을 기반으로 다방면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MICE사업도 담당하고 있어요. MICE사업은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회(Exhibition)의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 폭넓게 정의한 전시·박람회와 산업을 말해요. 쉽게 말해 관광과 비즈니스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회의만 하고 떠나는 건 아니잖아요? 이들에게 공연, 관광, 의료, 쇼핑 등의 다양한 즐길 거리를 제공할 수 있겠죠. 최근 우리나라는 국격이 높아지면서 각종 국제회의를 도맡아 하고 있어요. 더불어 한류라는 강력한 문화콘텐츠를 가지고 있지요. 이 둘을 묶어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MICE사업입니다.
 
-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MICE산업은 서비스업계의 반도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요. 성장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 방향도 무궁무진합니다. 한국의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는 어림잡아 1300만 명이 넘어요. 한류라는 엄청난 저력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가 이들에게 단순히 관광만을 제공하기엔 너무나 아쉽죠. 이제는 좀 더 멀리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가 지닌 강점을 바탕으로 전시, 공연, 더 나아가서는 카지노까지 제공하면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자부합니다.
 
 
● 저서 ‘곧 마흔, 자전거를 타고 시간 변경선에 서다.’에 대해서..●
 
1. 자전거로 미국을 일주로 하시겠다는 엄청난 도전을 생각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 특별한 계기가 있기 보다는, 미국을 떠나온 뒤로 항상 가슴속에 미국을 일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이를 실행에 옮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어요. 운 좋게도 저는 SM C&C로 자리를 옮기면서 5개월의 공백 기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제 인생에 다시는 없을 이 5개월 동안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들고 싶었고 마음속에 품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 일주에 도전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괜히 거창하게 들릴 수 있는데 사실 인생 뭐 있나요. 하고 싶으면 해야 합니다. 짧은 인생이니까요 허허(웃음)
 
 
2. LA부터 뉴욕까지 약 5130킬로미터라는 장거리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체력적인 부분이 큰 문제였을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따로 준비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 5130킬로미터라고 하면 선뜻 가슴에 와 닿지 않는데, 하루에 100킬로미터 이상을 자전거로 이동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체력이 가장 중요하죠. 그래서 저는 9년 동안 출퇴근에 자전거를 이용했습니다. 워낙 자전거를 타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체력 관리 측면에서도 자전거만한 것이 없어요.
 
- 평상시 체력관리와 더불어 2011년에 휴가를 내고 서울-통영 간 50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횡단했습니다. 해보기전에는 망설였는데 막상하고 나니 그렇게 힘들지가 않았어요. 혼자 생각하기를 5130킬로미터면 이 거리를 11번만 왕복하면 된다는 거니까...미국 일주에 앞서 체력적으로 압박감을 많이 느끼지는 않았어요.
 
 
3. 자전거 일주를 하시면서 겪은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 일주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친구 하나는 25살 재비어라는 청년입니다. 그 친구는 ‘walking across america’ 사인을 들고 걸어서 미국을 횡단하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 걸어서 미국을 일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죠. 흥미롭게도 저와 그는 오랫동안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지만 일주를 대하는 태도는 저와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우리의 공통점은 ‘I wanna make unforgettable memory in my life’였습니다. 일주를 하면서 이런 친구를 만나면 서로에게 힘이 되고 교감이 돼요.
 
- 횡단하면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기 때문에...사실 제가 20대 청춘도 아니고 허허(웃음)먹는 걸 정말 잘 먹어야 해요. 한번은 햄버거가게에서 백인 아주머니가 저에게 바이크? 혹시 자전거타고 횡단하는 거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그렇다고 말하니 엄치를 치켜세우며 칭찬하더군요. 반갑게 작별인사를 하고 저도 출발하려던 차, 아주머니가 다시 들어오시더니 저한테 돈을 주시는 겁니다. 이 돈으로 신선한 물하고 음식 사먹으라고 말이죠. 거절하면 실례가 될 것 같아 받았는데 그 배려와 고마운 마음이 와 닿아서 감동받았죠. 제가 받은 이 사랑을 저도 여행을 하면서 똑같이 실천했습니다.
 
 
4. 이러한 여행 동안의 경험을 저서에 고스란히 담아 내셨는데 저서를 통해 꼭 후배들에게 전달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 미국을 횡단하면서 크게 세 가지를 배웠어요. 도전에 대한 자신감,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대자연에 대한 겸손. 또한 자전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를 배워요. 하나는 진정성. 오직 자기 두발, 즉 자신의 노력으로만 탈 수 있어요. 또 한 가지는 자기주도성.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멈추고 싶으면 멈출 수 있죠.
 
- 미국일주를 인생의 마라톤에 비유하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의 출발선에서 많은 이들이 자기만의 방식대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운 좋은 사람은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남들보다 더 빨리 달려 나갈 수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걸어서 갈 수도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생의 마라톤은 결승점이 없다는 겁니다. 결승점은 스스로가 정하거나 달리면서 잡아나가야 해요.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결승점을 정해 놓지 않고 무작정 달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히려 결승점을 잡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결국에는 자기 인생에 있어 승자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인생 자체를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의존하거나 간섭받기 시작하면 그건 자기 인생이 아니잖아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5. 갔다 온 뒤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 저를 보는 시선이 완전 변했어요.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실천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특히 30~40대 어르신들이 많은 감명을 받아요. 돈 버는 것에만 열중하다 보니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잊고 사시니까. 사실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느냐가 중요하죠. 제 강연을 듣고 나서 참가자 분들 중에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해요.
 
 
 
 
● To make a better world ●
 
1. 인생의 버킷리스트인 자전거로 미국을 일주를 하시는 대단한 도전을 성공하셨는데,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이루고 싶은 도전적인 버킷리스트가 있으신지?
 
- 기회가 된다면 런던에서 이스탄불까지 여행을 하고 싶어요. 미국처럼 자전거 일주를 생각하지는 않지만 배를 타고서라도 가고 싶습니다. 4000킬로미터 조금 넘더군요. 아, 그리고 3년 안에 아내랑 같이 세계 일주를 계획하고 있어요.
 
- 제 최종적인 꿈은 ‘Make a better world’입니다. 월트 디즈니사를 비롯한 많은 대기업들의 비전과 같아요. 저는 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불우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요리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불우청소년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면서 사회에서 홀로 설 기회를 제공하고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이미 이름까지 생각해뒀어요. ‘세요리따’라고 ‘세상을 요리로 따뜻하게!’의 줄임말입니다.
 
 
2.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대학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꼭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가요?
 
- 제가 느끼기에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을 하려면 세 가지 중 하나가 필요해요. 지식, 경험, 그리고 인맥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자석과 철가루 비유해서 말해 볼게요. 젊은 시절을 하나의 판이라고 생각해봐요. 젊기에 경험, 인맥, 지식이 모두 부족합니다. 즉 판에 철가루가 듬성듬성 있어요. 이 상황에 자석이 없는 경우도 많아요. 설사 있다고 해도 철가루가 너무 흩어져 있기에 한 곳에 모을 수 없어요. 뭘 해야 할지 모르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어떻게 성취해야할지 허둥대는 시기가 20대에요. 당연합니다. 성장하는 시기이니까요. 대학시절에는 몰라요.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남들이 취직을 해서 떠나는 걸 보면 마음이 다급해집니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자신만의 자석을 찾기도 못한 채 지금껏 자신이 모아온 철가루들을 쉽게 흩날려 버리는 경우를 많이 접해요.
 
- 취직한 친구가 연봉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잘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절대 부러워하시면 안 됩니다. 젊은 시기에 돈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면 20대, 30대는 돈을 버는 시기가 아니에요. 이 시기에는 자신의 판에 철가루를 쌓아가는 시기입니다. 인생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뿌린 대로 거둬요. 젊은 시기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판에 철가루가 수북이 쌓아두셔야 해요. 즉 자신의 인생에 지식과 경험 그리고 인맥을 풍성하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판에 꿈이라는 자석을 던지세요. 자석이라는 꿈이 세면 셀수록 좋겠지만 미약해도 괜찮습니다. 이미 판에는 자석의 힘이 미약해도 충분히 많은 철가루가 많기 때문에 던지기 만해도 엄청난 철가루들이 하나로 응집될 테니까요. 연봉과 취업.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왜 돈을 버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조급해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판을 키우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덕을 쌓는 겁니다. 덕을 쌓는 인생을 사시면 좋겠습니다.
 
취재 : 홍보대사 장필수(경영학부 4학년)
          홍보대사 김다영(신문방송학부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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