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에서 봉직하다 정년퇴임한 교수님들의 모임이 있다. 같은 캠퍼스에서 반생을 지낸 분들이 자주 만나 담소를 나누거나 여행을 다니는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50여명의 퇴임교수 외에 몇 분 현직 시니어 급 교수님들도 함께 하고 있다. 여러 전공 분야와 1, 2 캠퍼스를 아우른 친목 모임으로서 여러 해 동안 명칭도 없이 지내왔다.
그러다가 작년 들어서야 국내외 문화탐방 나들이에 필요하여 중앙 백수(白壽)연구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봉사하는 자세로 생활하자는 이름이다. 비록 법정 정년을 맞았지만 고령화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름대로 사회 발전에 제 몫을 다해보자는 취지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드번호도 백세 가까이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다 다시 일어선다는 9988 231로 정해 놓고 있다. 초대 회장인 교육학과의 홍성윤 박사에 이어서 현재는 의학과의 이희성 박사가 회장 일을 맡아 수고하는 중이다.
회원들 다수는 요즘도 대학에 출강하거나 사회 요직을 지니고 저술 등에 종사하고 있다. 고문인 이종훈 덕성여대 이사장을 비롯해서 김호일 안중근의사 기념관장, 또는 기업체 이사, 농장 경영 등에 임하고 있다. 약대의 허 교수는 한 해가 멀다 하고 전공 밖의 두보, 이백 등의 한시집을 번역, 출간하고 있다. 과연 인생의 후반전을 이겨 낸 다음 연장전과 승부차기에서도 승리할 자세로 임하고 있는 듯싶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신념에서일까, 거의가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서 백수연구회 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나라 안팎을 드나들며
회원들은 가끔씩 견문을 넓히기 겸하여 국내외에 문화탐방을 다녀왔다. 정작 현직교수로 재직 때는 전공강의와 연구 논문쓰기 및 학생지도 등으로 못 다했던 처지였으니. 필자도 재작년 여름에는 일행과 더불어 처음으로 중국북경과 상해지방에 다녀온 바 있다.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천안문은 물론이고 상해 임정건물과 푸동 개발지 들을 돌아본 인상이 선하다. 뿐만 아니라 덕분에 바다처럼 넓은 서호(西湖)와 함께 백낙천 소동파와 같은 문인을 낳은 항주(杭州), 미녀나 명주로 유명한 물의 고장 소주(蘇州)의 정취도 맛볼 수 있었다.
작년 가을에는 동부인한 일행 29명과 더불어 강화도에도 다녀왔다. 문화유적과 특산물은 물론 단풍정취까지 유익하고 즐거운 하루를 만끽하였다. 신미양요와 운양호 사건이 얼룩진 광성보, 초지진, 몽골침략 당시의 옛 조정 터, 유서 깊은 고려시대 정취의 전등사 등. 이런 나들이 때마다 청년 복장인 최상진 총무의 연락과 식수제공 서비스도 고맙기 그지 없다.
특히 지난 2월 중순, 1박 2일의 경북지방 문화탐방은 기억에 남는다. 아침에 서울을 출발한 33명은 관광버스 속에서도 수학여행 학생인양 교양 익히기와 학습에 여념 없었다. 회장 인사와 일정 안내가 끝나기 바쁘게 해외 문화탐방 보고가 시작되었다. 교수라는 본업을 퇴직 후에도 버리지 않은 나머지 백수연구회라는 값을 톡톡히 치러내는 느낌이었다.
금년 초에 아프리카 남부 오지에 다녀온 김길조 교수께서 영문으로 된 세계의 인구통계표를 나눠주며 설명했다. 현재 세계 212개국 중에서 인구별 순위는 13억의 중국, 11억의 인도, 3억의 미국 등에 이어서 우리는 종합 18위이다. 남한 4천 8백만여 명(26위)과 북한 2천 4백만여 명(47위)을 합한 7천만여 명의 한국인은 당당히 세계인구의 1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란, 프랑스, 태국, 이탈리아보다도 상위에 있는 셈이다.
아프리카 50개 나라 가운데 다섯 나라를 보름동안 다녀온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남아공의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에 벌어진 빈부격차는 크지만 행복지수는 원주민측이 높다는 것이다. 짐바브웨, 잠비아, 보츠아나, 케냐 지역에 흩어진 채 오지에 살고 있는 마사이족의 벌거벗고 사는 모습이 부럽단다. 난장이족으로 유명한 피그미족 역시 원시인처럼 가난해도 문명한 백인들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견해였다.
필자 또한 구정 전에 모처럼 18일 동안 중남미 일곱 나라를 탐방하고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생소한 스페인어권의 라틴문화에 파괴된 현지 전통문화의 피폐상이 안타까웠음을 전했다. 멕시코의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 페루의 잉카문명은 우리와 맥이 닿는 몽골계 인디오들의 유적들로서 산 역사로 다가왔다. 특히 페루 산 위의 도시 피츄피츄, 세계에서 가장 높고 넓다는 티티카카 호수와 우로스섬은 제일 장관인 이과수 폭포에 버금가는 관광 상품이 되고 남는다고 보았다. 쿠바 아바바에 위치한 헤밍웨이 문학관과 칠레의 산디아고에 자리한 네루다 시인의 문학관은 노벨상 수상 문인의 기념관으로 깊이 기억된다고 말하였다.
시니어들도 쓸모가 있을지니
그러는 중에 누군가 스스로 준비해 와서 배포한 <얄미운 시리즈> 유인물을 읽어 일행은 킥킥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90대에도 여기저기 아프다고 종합검진 받는 남자/ 40억도 없으면서 士字 사위 본다는 X/ 60억이나 가진 X 이 60살도 안 되어서 죽는 X 등.
이어서 <저승사자가 부르시면>시리즈가 계속 웃음을 자아냈다.
喜壽 (77세) - 지금부터 老樂을 즐긴다고 여쭈어라.
傘壽 (80세) - 아직 쓸모가 있다고 여쭈어라.
米壽 (88세) - 쌀밥을 더 먹고 가겠다고 여쭈어라.
白壽 (99세) - 때를 보아 스스로 가겠다고 여쭈어라.
안동 입구에 내린 일행은 그 곳 선비고장답게 명맥을 이어오는 전통한지 공장을 견학했다. 닥나무 껍질로부터 숱한 수작업을 거쳐 품격 높은 여러 종류의 한지를 만드는 공력은 기계로 뽑은 종이와는 차별성을 지닌 전통문화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거의 손자들에게 줄 한석봉 천자문을 두 세장씩 기념품으로 사고 있었다. 그리고 하회마을 역시 영국의 여왕이 생일상을 받을 정도로 유교문화전통의 풍광을 자랑하였다. 토담과 솟을대문 너머로 북촌댁과 충효당 등의 문화재급 고택들이 돋보였다. 하회 탈춤의 여러 가면들도 즐비했다.
잠시 점심을 든 일행은 인근의 옛 사찰 답사 길에 올랐다. 13세기에 주심포 양식으로 세워진 봉정사의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란다. 그래서 영국여왕도 이 절에 들려간 모양이다. 완만한 곡선을 이른 배흘림 식 기둥은 고려인들의 지혜와 후덕을 느끼게 하고 남았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나마 조선조 태종 때 지은 숭례문 소실의 아쉬움이 조금은 삭혀지는 듯싶었다. 더구나 여행사 가이드의 피상적인 안내를 보충 설명한 사학과 김 박사에 의하면 숭례문보다 더 오래된 목조 건물은 현재 두 개가 더 있다니 안심이 되었다. 봉정사 극락전과 유사한 연대에 지어진 부석사의 무량수전, 그리고 백제 때 세워진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이 남아 있다니 말이다.
각 지역 동문들과 만나다
이날 저녁에는 울진 후포항 식당에서 영덕 대게로 저녁을 했지만 영 개운치가 않았다. 버스에서부터 계속된 학습에 시달린 데다 현지의 얄팍한 상흔에 실망한 때문일까. 백암 온천에 들어서도 심드렁해 있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아 일신된 기분이었다. 안동 사는 약대 동문 권상호 박사가 양주보다 비싼 안동 소주를 큰 것으로 하나씩을 보내온 것이다. 마침 현지의 보건대학 책임자로서 회의 참석차 서울에 있다가 은사님들이 오셨다기에 한사코 밤길을 달려왔다는 것이다. 덕분에 단잠을 이룰 수 있었음을 고맙다는 인사로 대신하고 싶다.
이튿날에는 경북 내륙으로 한참을 굽이돌아 봉화군에 도착했다. 이름부터 생소한 오지인데도 면적이 서울의 두 배라며 안내 나온 군청 여직원은 PR했다. 약대 동문인 엄태항 군수는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 준 교수님 일행을 특별한 관광귀빈으로 맞이하는 자세였다. 하지만 공인임을 감안해서 일행은 회비로 중식대를 계산하고 모교기념품을 건네며 격려했다. 군정을 두 번이나 맡아오면서도 항상 모교를 생각하여 모범을 솔선해 온다는 동문이다. 정성껏 맞는 마음과 자랑스럽게 활동하는 정을 담은 조촐한 기념품으로 충분했다.
봉화읍에 인접한 닭실마을의 충재(冲齋) 고택과 유물박물관에 가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5백년을 이어온 안동 권씨종택 유품 4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집안의 장손인 권충원 동문이 우리 대학의 전자공학과 출신이라서 더욱 뜻 깊었다. 권 동문의 후의로 특별 주문해 빚은 고급한과 한 상자씩을 일행 모두에게 선물하여 고맙기 그지없었다.
이어서 영주 부석사를 찾은 일행은 전설적인 바위와 국보인 그 무량수전의 배흘림 건축미에 매료되었다. 뒤늦게나마 이렇게 빼어난 자신의 전통문화에는 등하불명인 채 해외문화에 치중해온 우리 처지가 뉘우쳐졌다. 마지막 코스로 들른 순흥문화촌 가운데 소수서원(紹修書院)은 모두가 더 새롭게 여겨졌다. 조선조 명종 때 왕께서 친히 써 내린 사액서원의 효시로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본거지여서였다. 일찍이 이 지방에서 태어나 우리 성리학을 개척한 고려 말의 안향선생을 배향한 이 서원은 중앙정부의 성균관에 버금갈 만큼 튼튼한 사립대학의 역할을 맡아왔던 것이다. 필자는 이 서원과 박물관을 둘러보느라고 모처럼 통화해서 만나러 나오겠다는 교육학과 출신 박영교(시인, 전 여고 교장)동문도 못 만나고 말았다.
저녁시간에 상경하는 버스 속에서 일행의 연구노력은 계속되었다. 약대의 손동헌 박사는 사진을 곁들인 유인물 두 장을 나눠주며 국보인 추사의 ‘歲寒圖’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주에 유배 중이던 추사(김정희)가 멀리 중국에 역관으로 오가며 구해온 귀중한 책들을 보내준 제자(이언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준 그림이란 설명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공자의 논어를 인용한 발문이 뜻 깊다. -“세상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따르기 마련인데”,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라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 옆 자리의 허인회 박사도 집안 할아버지인 미수 허목의 한시를 풀이하려다 피로한 일행을 위해 접는 모양이었다.
서울이 가까워오자 고문격인 두 선배님이 상의한 다음 필자에게 권했다. 이렇게 유익한 문화체험과 이심전심인 동문 사랑의 미담을 글로 발표해 보자고. 얼떨결에 대답한 후배는 부담되면서도 유쾌했다. 동문들한테서 전해 받은 대보름 선물보따리 때문이었을까. 어떻든 오는 5월에는 예정대로, 회원들과 더불어 늘 베풀기만 하는 박수복 선배님의 강변농장에 가서 하루쯤 선후배 정을 다지며 좋은 공기도 실컷 마시고 오리라.
이명(정외 12, 모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