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경제78) 칼럼] 愛民과 이웃사랑이 열정 낳았건만

“우리 사회를 키워냈던 가치들을 재구축 하지 못하면 미래는 기약하기 어렵다”

국민일보
입력 : 2016-10-09 18:58
 

[조용래 칼럼]  愛民과 이웃사랑이 열정 낳았건만 기사의 사진
일본에서 기독교가 시민권을 얻은 것은 1873년이다. 1884∼85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의 방한과 비슷한 시기다. 다만 이후 양국의 기독교세 추이는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반면 일본은 아직도 인구의 1%를 밑돈다. 
 
종교학자 아마 도시마로는 ‘일본인은 왜 무종교인가’(1996)에서 종교를 내면과 외면으로 나눠 내면만을 정통적인 것으로 보려는 메이지시대 지식인들의 종교관에 주목한다. 예식과 설교를 외적인 것으로 보고 가벼이 여긴 탓에 기독교 포교가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종교환경도 중요하다. 일본에선 도처에 널린 신사에서 누구나 값싸고 손쉽게 종교적 평안을 얻을 수 있었기에 새 외래 종교는 눈길 밖이었을 것이다. 반면 부패와 가난에 시달리던 조선에선 억불숭유 정책 탓에 산으로 밀려난 불교를 가깝게 접하기조차 어려웠다. 기댈 곳 없는 백성들에게 신분질서를 초월한 기독교는 퍽 매력적이었을 터다.

조선말의 기독교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문자, 즉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다. 1446년 반포된 한글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지만 기독교 도래를 계기로 활발하게 활용된다. 1887년 한글판 신약성서 ‘예수셩교전셔’가 완역·발간됨으로써 한글은 명실 공히 기독교 전파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한글은 애민(愛民)의 징표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가엽게 여긴 세종대왕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수백년을 건너뛰어 기독교와 만났다. 그때 기독교는 현실이 곤궁하고 참담했지만 현세 초월적인 경건함으로 삶을 감당하면서 이웃사랑과 더불어 공동체를 중시했다. 

한글의 애민정신과 개신교의 이웃사랑이 결합함으로써 역사가 새로 열렸다. 문자는 지식과 문화의 통로이며 꿈이 전파되고 구체화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남은 것은 백성들의 각성과 변화뿐이었다. 그 때 그들은 기꺼이 동참했다. 애민과 이웃사랑이 열정을 낳은 셈이다. 

초기에는 열정이 조금 미약했다. 지배 엘리트층에까지 두루 확산되지 못했다. 하여 무너지는 나라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좌절은 없었다. 열정은 참담함 속에서도 작동했다. 애민은 더 이상 몰락한 왕조의 전유물이 아니라 독립을 향한 열정으로, 이웃사랑의 모습으로 꿈틀거렸다. 광복 이후에도 분단 한가운데서 통일의 열정이 식지 않았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애민, 이웃사랑, 열정이 있었기에 한국은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심지어 개발독재에 대해서도 그 이면에는 애민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을 정도였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수많은 산업 역군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초월적 가치에서 힘을 얻고 기꺼이 자기 몫을 맡았다.

열정은 역동적이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열정이 식고 있다. 흙수저, 헬조선 등이 거론되고 지배층의 일탈이 일상다반사인 속에 열정이 있을 리 없다. 애민정신이 흔들리고 이웃사랑의 근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부는 창조경제를 강조하나 성과는 거의 없다. 창조·창의력은 애민, 이웃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한글도 그렇고,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도 보다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공급하려는 이웃사랑의 실천에서 나왔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실종된 상황에서 창의력은 나올 수 없다. 

교계의 이웃사랑과 현세 초월적 가치 추구도 실종 상태다. 교회가 끼리끼리 그룹으로 전락했으며 초월성은 잊혀지고 현실추수적인 현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탓이 크다. 

열정을 키워냈던 가치들이 사라지고 있다. 애민과 이웃사랑을 재구축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기약하기 어렵다. 570돌로 맞은 올 한글날이 더욱 가슴 아팠던 이유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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