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5년 9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수가 약 539만 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청년들 사이에서 ‘나도 치킨집이나 해볼까?’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만큼, 창업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신규 자영업자들이 3년 안에 폐업하게 되는 수치도 무려 55%에 달한다. 창업의 진입장벽이 낮은 만큼, 소위 ‘망할’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탈 많고 변화무쌍한 대한민국 경제시장에서 홍재화 동문(무역학과 82학번)은 소규모의 제조업만으로 15년을 버텨냈다. 그가 설립한 회사 ‘필맥스’는 현재도 핀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각 지역에서 발가락 양말과 맨발 신발을 수출입 하고 있다.

 

홍재화 동문1.jpg

 

Mr.홍
고유의 브랜드 마케팅으로
유럽시장을 제패하기까지

 


“무역과의 연(緣)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었다”
 
  손에 든 커피, 신고 있는 운동화,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까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들을 구성하는 원자재들은 모두 바다를 건너, 혹은 비행기를 타고 타국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자원이 빈약해 무역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에서 이제 무역은 곧 삶이고, 생활에 직결되는 ‘숨’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엑셀과 포토샵만큼이나 무역 관련 지식이 일반화 된 오늘날, 홍재화 동문은 무역업계에서 30여 년을 지냈다. 현재는 한 기업의 수장이자 7, 8권의 책을 집필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학교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학교까지 직접 와주셔서 감사하다. 얼마만의 모교 방문인가.
“1년에 한 번은 꼭 학교에 들르는 편이에요. 3년간 활동했던 해룡당 동아리 모임이 종종 있거든요. 홈커밍데이나 체육대회가 있을 때도 모교를 방문해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기자님, 술 잘해요? 우리 인터뷰 후다닥 끝나고 소주나 한잔하러 갑시다.(웃음)”
   
 

-소주 아주 좋아한다. 일단 동아리에 대한 설명을 마저 좀 부탁드린다.
“해룡당은 MBA, 대학원 진학, 유학을 목표하고 있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동아리예요. 외국어에 흥미가 많았던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시작했던 동아리인데, 학교생활의 원동력이 됐어요. 1979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걸 보면 꽤 전통 있는 동아리죠. 영어 실력의 향상뿐만 아니라 국제화된 경영마인드도 배울 수 있어 제가 취직할 때도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종종 학교에 오게 되면 동아리방에는 꼭 들려요.”

-외국어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학구열이 대단한 학생이었나 보다.
“공부와 학점을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는데 공부에 어느 정도 열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삼수해서 중앙대에 들어왔거든요.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 끝에 재수를 결심했어요. 의도치 않게 삼수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때 세상 우울한 맛도 좀 보고 놀기도 좀 놀아보고 그랬네요.(웃음) 늦게 들어온 대학이라 그런지 휴학은 생각도 못했고 학교 다니는 내내 본업에 충실하며 성실히 다녔어요.”

-무역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던 80년대 당시, 무역학과로의 진학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하다.
“환경적인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저희 작은아버지가 8톤 트럭을 몇 대 구입해 운송 중개업을 하셨거든요. 군대 제대를 하고 시간이 좀 남아 아르바이트 겸 트럭 조수를 했어요. 그때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부둣가에서 큰 무역회사들의 물품들이 운송되는 모습을 보고 무역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죠. 자연스럽게 대학 전공도 무역학으로 결정하게 됐고요. 그러고 보니 무역과 맺은 인연이 올해로 벌써 30년이 넘어가네요.”
 
   
 
-질긴 인연이다. 그 전에 학창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늦게 입학한 만큼 남들보다 마음가짐이 달랐던 것 같아요. 재밌는 추억들도 많아요. 특히 해룡당 동아리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고 1학년 때 주식투자를 해서 수익을 거두었던 것도 생각나네요. 제가 입학할 당시는 무역학과가 경영대 소속이었거든요. 경영을 배워보고자 친한 친구와 주식투자를 했는데 크게 이익을 보지는 못했어요. 당시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거든요. 주가가 한 번에 40%까지 폭락을 하면서 겨우 본전 찾고 100만원 정도의 수익을 냈죠. 손목시계 하나 차고 그 이후로 주식에서는 손을 아예 뗐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로의 입사는 계획된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저는 KOTRA 입사만 바라보고 공부했어요. 제2외국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한 덕분인지, 졸업 후 운 좋게도 한 번에 원하던 KOTRA에 입사를 하게 됐죠. 입사하고 나서 맡은 업무는 홍보·전시업무였어요. 그곳에 있으면서 다른 기업문화를 체험하고 일본 출장도 다녀오고 다양한 세계 경험을 많이 했죠. 많은 기자들을 상대하면서 ‘우리나라 언론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무역을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인생이 덜 지루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넉살 좋은 웃음을 짓는 홍재화 동문. 실로 그렇다. 모든 직장인들의 삶이 그렇듯 앞뒤 꽉 막힌 사무실의 책상에 앉는 순간, 바로 뒤가 그들의 10년 후고 그 뒤가 20년 뒤라는 말을 실감한다.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세계를 간접체험 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역의 매력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입사하고 싶어 했던 회사를 돌연 박차고 나오게 된다.
“파나마 무역관 부관장으로 회사생활을 무난하게 보내고 있을 때 외국 바이어들에게 창업 제의를 받았어요. 그전까지 저는 ‘사장으로 정년퇴직하겠다’며 큰소리치던 사람이었거든요. 절대로 회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고 남들 앞에 잘 나서는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던 제가 파나마 중남미 쪽에 파견되어 국외 바이어들을 만났을 때 생각이 달라졌어요. ‘홍, 네가 회사를 차려보는 게 어때? 우리가 도와줄게’라고 외부 바이어들이 바람을 넣었는데 그 말에 자신감을 얻어 1995년 당시에 회사를 설립했죠. 꿈은 이루어진다는 뜻에서 ‘드미트리’라고 회사 이름을 지었어요.”

-창업 당시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처음 사직서를 내려고 했을 때 집안의 장인어른이나 아버지는 큰 반대가 없었어요. 남자들은 호기롭게 ‘한 번 도전해봐’라고 말을 했지만 아내나 장모님은 반대를 좀 했어요. ‘내가 장사할 그릇인가?’하는 분석과 고민 없이 시작하는 것이 불안하셨던 것 같아요. 결국에는 가족의 지지를 얻어 제 의지대로 회사를 설립하게 됐지만요.”

-사업의 시작은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일이었다고 들었다.
“제가 중앙대에 입학했을 때 스페인어 특기로 들어 왔거든요. 금융의 중심지이자 물류의 중심지인 중남미에 당시 국내의 대기업들이 마케팅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던 상황이었어요. 자동차 부품과 관련된 해외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업이 처음이라 그런지 가격협상에 실패했죠. 국내 부품 회사와의 가격경쟁에서도 밀려 1년 만에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실패의 원인은 제가 장사에 대해 잘 몰랐던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사업을 시작할 때 곰곰이 고민해 보았어야 했는데, 저는 해외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것 같아요. 팔기도 잘 팔아야 하지만 사기도 잘 사야 하는 게 장사거든요. 국내 물품의 단가, 가격의 적정선에 대해 저는 무지했어요. 하지만 이 경험을 발판으로 다음으로 벌인 사업에서는 15억의 매출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발가락 양말을 중년 아저씨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이래 봬도 15억의 매출신화를 이룩하며 유럽권을 주름잡은 잇 아이템이다. 선배의 권유로 발가락 양말을 수출하게 된 그는 회사의 이름도 ‘드미트리’에서 ‘필맥스’로 바꿨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던가. 2005년 첫 사업의 쓴 고배를 마셨던 그였지만 강소기업으로써 회사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회사 이름을 필맥스로 바꾸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초기 회사 이름인 드미트리는 ‘Dream is true’의 줄임말로, 유럽권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기 쉬운 이름이었어요. 독일이나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 중에 드미트리가 많아 외우기 쉽거든요. 한국에서는 ‘드미트리’라고 하면 ‘트미트리?’, ‘도미트리?’ 라며 잘 외우지 못하는데. 그래서 사업 초기에 회사 이름을 팔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발가락 양말이 본격적인 주력 수출품이 되며 기존에 있던 이름을 필맥스라고 바꾸게 되었어요.”

-왜 하필 ‘발가락 양말’을 수출하려고 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사업 초기에는 많은 아이템들을 물망에 올려놓았어요. 지금 생각을 해보면 제가 하게 되는 모든 일들은 다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주어졌던 것 같아요. 발가락 양말도 싱가포르에 있던 선배 추천으로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나중에 사업이 잘되어 기계도 늘리고 공장도 새로 짓게 되면서 점차 사업의 규모를 늘려나갔어요.”

-발가락 양말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한국에서 발가락 양말은 무좀 양말로 팔리잖아요. 제가 핀란드와 미국, 독일을 주 거래처로 상대하면서 무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15년 동안 손에 꼽히는 것 같아요. 그곳에서 발가락 양말은 오히려 패션 양말로 팔려요. 한국에서 발가락 양말은 거의 남성들이 주 고객이지만 유럽에서는 매출의 80%가 여성용이죠. 똑같은 발가락 양말이지만 어떤 점을 어필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팔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이래서 마케팅이 재밌는 것 같아요.”
 
-필맥스 사의 브랜드 마케팅 전략은무엇이었나.
“저희는 ‘새로운 세대의 양말을 만든다’는 마케팅 전략을 사용했어요. 한 켤레에 1만3000원인 저희 양말은 초기에는 선명한 색감을 강조해 패션 양말로 팔았어요. 나중에는 참숯과 대나무 소재를 사용해 향취와 항균기능을 강조하여 팔았죠. 그 이후에는 천연 비단 양말을 만들었는데, 한 켤레 당 5만원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꽤 수익을 냈어요. 북유럽은 인구대비 금메달리스트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주로 발에 민감한 올림픽스키어들이 주 고객이 되어주었죠.”
 
-얼마나 많이 팔렸나.
“그냥 양말계의 BMW였다고 보면 돼요. 노르웨이에서 왕자가 태어났을 때 핀란드 대사가 우리 회사 양말을 선물했을 정도니까요. 당시에 노르웨이 왕자가 고맙다는 사인을 해서 보내준 일이 생각나네요. 저희 양말이 혁신적인 아이템이었다는 반증인 셈이죠.(웃음) 한국의 이미지 개선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발가락 양말의 파급력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그러나 장사수완만큼 중요한 것이 인사관리인데, 경영철학을 듣고 싶다.
“무조건 단골이 최고라는 주의로 일해요. 직원들과의 관계도 똑같아요. 저는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실력 차이는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실력이 뛰어나지만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보다는 일을 못 하더라도 성의껏 한결같이 오래 남아 줄 사람이 좋더라고요.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도 사장에게 필요한 기술이죠. 사원을 뽑고 나서 그 사원이 업무에 숙련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투자거든요. 창업을 하고 이런 점들을 많이 느꼈는데 그런 점을 책으로 낸 적도 있어요. 『결국 사장이 문제다』라는 제목으로.”

-어떤 책인지 설명 부탁드린다.
“지난 15년간 몸소 체험한 철학들을 담은 책이에요. 대기업과 소기업은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사장의 역할이 회사의 흥망을 결정짓는다는 내용이에요. 어떤 기업이든 한국사회에서 결국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은 사장이에요. 회사의 규모가 작을수록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거래한다는 말도 있거든요. 저 같은 경우에도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고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독서를 하려고 노력해요.”

-성공과 실패를 규정짓는 분명한 기준선이 있는지 궁금하다.
“글쎄요. 저는 성공한 인생을 결정짓는 기준을 2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질적인 풍요와 행복한 가정생활이 성공의 기준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저처럼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늘 마음이 무겁고 항상 불안하죠. 사업이 잘되어 성취감을 느끼다가도 그다음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과 근심이 항상 뒤따르고요. 그래서 이런 고민과 걱정을 완화시켜줄 편안하고 행복한 가정이 꼭 필요해요. 집에 들어가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그런 환경 말이에요. 저만 하더라도 사회에서 받는 불안감을 집에서 많이 치유하는 편인 것 같아요.”

-현재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근황을 좀 알려 달라.
“현재는 사업의 규모를 좀 줄이고 출강에 집중하고 있어요. WTO(세계무역기구)에서 수입수량제한 정책을 펼치면서 팔 수 있는 수량이 한정되어 버렸거든요. 예상하던 판도와 상황이 많이 달라져 현재는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강의하는 것은 질색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재미를 느껴 얼마 전에는 KOTRA의 신입사원 대상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죠.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일은 정말 답답한 일인 것 같아서 ‘독서론’에 관한 책도 내볼까 생각 중이고요. 책에 관한 책, 글에 관한 글인 셈이죠. 기자님, 이제 인터뷰는 거의 마무리 된 것 같은데. 슬슬 한잔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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