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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신인드래프트를 앞둔 일명 취업 준비생이자, 실속 있는 가드로 불리며 모두가 눈여겨보는 박지훈(중앙대)의 농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벚꽃의 향연, 대학 축제의 열기가 가득한 5월. 여느 20대와 다름없이 봄을 즐기고 싶은 박지훈은 교정을 거닐며 아쉬움을 달랬다. 마음과 달리 그의 현실은 팀 성적을 위해 하루 종일 훈련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

 

그는 “학교 축제인데 훈련해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제가 팀의 꽃 같은 존재니까 애들만큼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요?”라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모든 기록은 2016년 4월 22일 기준)

 

 

농구가 하고 싶어요!

어린 박지훈은 그저 사촌 형이 부러웠다. 한 손에 농구공을 끼고 코트를 누비는 형을 보면 심장이 뛰었기 때문이다. 농구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이면서도 빠른 스피드로 달릴 수 있는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어 농구 선수로 자라기 딱 좋은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그의 성화에 못 이긴 부모님은 그의 꿈을 뒷받침해주셨고, 박지훈은 12살의 나이에 농구를 시작했다. 

 

송림초등학교에서 농구를 시작했던 박지훈은 누구보다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그도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놀고 싶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럴 법도 하다. 하교 후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고 놀이터에서 놀 나이에 체육관 한쪽 구석에서 2~3시간 남짓 농구공을 튀기고 있었으니 얼마나 지쳤을까. 그렇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말썽을 피운 적은 없어요”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동기들에 비해 뒤늦게 농구를 시작한 탓에 많은 출전 시간을 보장받진 못했다. 또 또래보다 작은 신장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어진 자신의 출전 시간에 만족하며 다른 선수들의 뒤를 받쳤다. 이에 그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어요”라며 뒤늦게 진실(?)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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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조연’이었던 소년, 그의 슬럼프는 길었다

이번 시즌 대학리그에서 화끈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중앙대의 에이스로 우뚝 선 박지훈. 하지만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는 약 9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잖아요. 저는 힘들었던 시절이 밑거름이 돼서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송림초를 졸업한 박지훈은 별 탈 없이 ‘가드의 산실’이라 불리는 송도중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선배들과 마주하며 농구를 배웠고, 강도 높은 수비 훈련과 개인기 등을 연마했다. 이에 박지훈은 내심 자신의 기량이 성장한 것 같아 뿌듯했고 ‘나에게도 출전 시간이 주어질까?'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고.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량이 좋아진 것은 틀림없었지만 최원혁(서울 SK)과 한상혁(창원 LG), 한희원(안양 KGC인삼공사) 등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려 주로 벤치를 지켰다. 그가 코트에 발을 디딜 땐 주전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투입된 정도였다. 

 

학년이 차오를수록 출전 시간에 대한 기대감은 커졌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당시 송도중은 2007년 추계 대회와 2008년 춘계 대회 준우승, 2008년 협회장기 대회 3위를 차지하며 우승후보로 성장했지만, 박지훈은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결국 기회를 잡지 못한 그는 농구를 그만 두겠다고 선언하며 팀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이 박지훈의 발목을 잡았다. 첫 번째는 농구를 그만 두기엔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교 선배인 신기성 감독(인천 신한은행)처럼 멋있는 선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박지훈은 곧바로 마음을 바꿔 코트로 복귀했다.

 

다시 돌아온 박지훈은 그 순간부터 이를 악물었다. 그전보다 더 독하게 ‘악바리’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도 박지훈은 다시 한 번 출전 시간의 벽에 부딪쳤다. 고등학교 진학 이후 선배 한상혁, 후배 손홍준(한양대)과 장태빈(고려대) 등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절묘하게 끼어 자신의 가능성을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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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군단 중앙대에 첫 발을 딛다!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다. 큰 활약 없이 조용히 지내던 박지훈은 고교 3학년 시절 자신의 슬럼프를 극복하고 송도고의 떠오르는 별로 등장했다. 그는 한양대로 떠난 한상혁의 빈자리를 말끔히 채우며 팀 공격을 주도했고, 가드로서 갖춰야 할 스피드와 리딩 능력을 여지없이 발휘하며 ‘송도고=가드’라는 공식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박지훈은 박준영(고려대), 정인덕(중앙대) 등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2012 쌍용기 대회 3위를 이끌었다. 또 이 대회에서 미기상을 받았고, 한 경기 평균 3.7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어시스트 상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이종현(고려대)과 최준용, 천기범(이상 연세대) 등 황금 세대 사이에서 당당히 ‘박지훈’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알리며 12개 대학 팀들에 자신의 실력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3년 동기 정인덕과 함께 중앙대 유니폼을 입었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중앙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김선형(서울 SK)과 오세근, 강병현(이상 안양 KGC) 등 국내 최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한 대학농구의 명가 중앙대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앙대가 대학농구의 최정상을 지켰던 시기에 농구를 시작해 언제나 ‘중앙대는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입학 후에도 그의 ‘중대 로망’은 식을 줄 몰랐다. 낯을 가리는 박지훈은 처음엔 선배 이호현(서울 삼성)과 함께 숙소 생활을 하는 게 걱정됐다. 이전엔 전혀 숙소 생활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 그에 대한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친절하고 장난기도 많은 이호현의 행동에 그의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편안하게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이)호현이 형이랑 또 같이 생활하고 싶어요. 그때가 즐거웠는데… 형이 보고 싶어요”라며 이호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중-남고를 졸업한 박지훈은 ‘남녀공학’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는 “꼭 여학생 때문만은 아니고 일반 학생과 친해질 수 있어서 좋았던 거죠”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전공이 스포츠과학부라는 특성상 여학생이 많지 않다는 점에 대해 탄식했다.

 

②편에 계속...

 

[출처 : http://www.winternews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48]

해당 기사는 <더 바스켓> 2016년 5월호에 게재한 기사를 추가/각색한 것입니다.

황가영 기자 missa1129@thebasket.kr
사진 : 이현수 기자 hsl_area@thebask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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