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5년 3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서예. 어렵고 낡은 이미지다. 긴 도포를 걸친 엄한 선비가 소매 단을 걷어 올린 채 꼿꼿이 붓을 세워 글씨를 쓰는 장면이 연상된다. 여든 한 살의 서예가를 만나기 전 생각이 많았던 것도 그 이유다. 혹시나 인터뷰가 지루하지 않을까, 행여 실수해 꾸중을 듣는 것을 아닐까. 그러나 정하건(법학과 57학번) 동문은 반듯하면서도 유한, 염치와 예의를 지키면서도 세상과 잘 통하는 서예가였다. 옛것을 사랑하는 붓을 든 선비, 정하건 동문. 누가 서예를 고루하다 하는가. 이제 서예는 고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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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5대 서예가라는 
세간의 평에도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과
쉼 없는 배움만 있을 뿐 
 
 서예를 글자와 선의 예술이라고 알고 있다면 크게 틀렸다. 서예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다. 그중에서도 자화상이다. 한지 위에 쓰인 한 획 한 획이 보여준다. 그가 유쾌하고 호탕한 사람인지 아니면 고독하고 섬세한 사람인지. 그래서 알 수 있다. 정하건 동문은 방정하고 반듯한 성품을 가진 서예가란 사실을. 흘려 쓰지 않고 정확한 비율을 지켜 획을 긋는 해서체의 대가로 알려진 원로 서예가 정하건 동문. 그는 인사동에서 서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현대 5대 서예가로 꼽히기에 만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내 지난 삶을 돌아보면 엄청난 업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전화에는 흔쾌히 응했다. 모교의 예쁜 후배들이 찾아온다기에.”
 
 -전화를 끊자마자 ‘송천서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봤다. 찾아보니 인사동에 있더라.
  “인사동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전통의 거리다. 인사동 위쪽에 있는 안국 로터리 쪽은 화원을 기르던 도화서가 있던 곳이고 인사동 아래쪽인 종로는 예부터 시나 서화로 밤을 지새우던 곳이지 않나. 지금은 상업적인 흐름이 타고 들어와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 좋은 서실이 버티고 있어야 문화·예술·전통의 맥을 이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이곳에 남아 있고 싶다.”
 
 -서예만으로도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이 가능했으면 좋겠지만 위상이 예전 같지는 않다.
  “근심이다. 서예는 단순한 글씨가 아니다. 인성교육에 서예가 최고다. 불교의 법구경 구절, 유교의 명심보감, 사서삼경 … 여기서 좋은 가르침을 반복해서 보고 쓰는 것이 서예가 아닌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저절로 예의와 염치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글씨를 쓸 때는 호흡도 조절해야 하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효과가 저절로 얻어진다.”
 
 -예전에는 학교 수업에서 붓글씨를 쓰곤 했는데 요새는 학교에서마저 기회가 없는 것 같다.
  “나라가 엉망이 돼 가는 것도 이러한 인성교육을 포기해서 아니겠나. 멀리 내다보는 교육을 해야 되는데. 늦었겠지만 너희(기자들)라도 다음에 꼭 배우러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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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長厚淸修 장후청수> 70x67cm‘공손하고 후덕하여 행실이 맑고 아름답다’는 뜻. 의미가 정하건 동문의 삶을 닮았다. 해서체의 대가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정하건 동문은 일찍부터 예의와 염치를 배웠다. 정하건 동문의 조부가 5살 때부터 그에게 서예를 가르친 덕분이다. 미운 5살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그 나이에 그 나름대로 엄청난 말썽을 부렸을 법도 한데 그는 예외다. 그 때부터였을까. 이렇게 곧고 반듯한 사람이 된 것은.
 
 -서예는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나.
  “어려서부터 조부님께 가업으로 내려온 한학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서예도 하게 됐다. 5살 때부터 일 거다. 아버지가 형제 중 맏이라 장손인 내게 한학을 배우게 하신 것 같다.”
 
 -아무리 5대 서예작가라도 처음부터 잘 쓰진 않았을 것 같은데.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웃음) 조부님께서는 친구 분들과 자주 시회를 열곤 하셨다. 그때마다 ‘글씨를 한 번 써 보거라’ 하시면서 귀여워하셨고 내 자랑을 친구 분들께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원래 잘 썼다는 의미인가.
  “그냥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해두자.(웃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서예를 배웠다. 힘들지는 않았나. 조용히 하면서 동시에 몸가짐도 바르게 해야 하는데.
  “조부님은 세 가지를 강조했다. 선비의 자세를 지킬 것, 공부하는 자세를 가질 것,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 이러한 가르침이 내 성격과 잘 맞아서 서예를 배우는 데 힘든 부분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에티켓을 가르쳐 준 것이다. 아까 말했던 예의와 염치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참다운 선비정신, 동양의 선비정신은 서양으로 말하자면 기사도정신이 아닐까. 항상 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품은 것 같다.”
 
 -어렸을 적 얘기를 더 듣고 싶다.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이곳이 38선 이북이었다. 광복 이후 북쪽 생활을 조금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때다. 그 때 공산주의의 실체를 봤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당시의 느낌이 엄청 생생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3학년 쯤. 당시 북에선 공산주의가 유행처럼 퍼졌는데 학교에도 마찬가지였다. 북에서 했던 공산화는 땅 있는 사람, 배운 사람, 돈 버는 사람 이 세 계층이 가진 것을 빼앗아 다른 계층에 고루 나눠주는 식이었다. 하루는 학교 선생님이 나를 지주의 아들이라고 불러냈다. 그러더니 내게 ‘자아비판’을 하라고 시켰다.
 
 -자아비판을 하라니.
  “20분이고 30분이고 앞에 세워 놓고 자아비판을 하라고 했다. ‘저는 못났습니다’, ‘저는 잘못했습니다’하는 생각들을 학습해야했다. 학교에서 자아비판을 하고 돌아와 조부님께 물었다. ‘자아비판이란 게 무슨 말인가요?’ ‘저는 무엇을 잘못했나요?’ 그런데 조부님과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항상 제가 한 질문에 대답을 잘 해주셨는데 그 때만은 말씀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말해주지 않으신 것일까.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보니 그 말의 뜻을 가르쳐주면 학교 가서 그 의미를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수구 반동자들이 자식을 이렇게 교육시켰냐’하고 끌고 갈까봐 걱정하셨던 거다. 그러나 피부로 느꼈다. ‘내가 설사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이렇게 나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하고 말이다. 참, 이게 또 법학과에 입학한 사연이 되기도 한다.”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한 정하건 동문은 중앙대 초대 총장을 지낸 임영신 박사를 만난다. 그리고 당돌하게 요청한다.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임영신 박사는 그가 쓴 독립선언서 10벌을 면밀히 검사하더니 흠 잡을 데 없이 정확하게 썼다며 감동의 칭찬을 건넸다. “학생, 됐어. 이제 공부 잘해야 돼.” 그의 서예 실력이 대학 생활에서도 크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사연이라니. 중앙대 법학과에 오게 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북에 있을 때 공산주의에 모질게 당했다는 생각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해야 할 즈음 단단히 다짐했던 것 같다. ‘나는 세상의 이치에 밝고 사리분별을 정확히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통일이 되면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벗어나지.’ 물론 이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세워보겠다는 의식도 있었고. 그래서 법학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가면서 어렵게 중앙대에 들어왔다. 특히 입학시험까지 치러서 들어와 스스로 서울대 수석보다 더 대단하다고 자부하면서 자랑스럽게 학교를 다녔다.”
 
 -서예와 법학이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힘들게 입학한 법학과는 잘 맞았나.
  “원래 침착하게 뭐든지 다 잘하는 성격이라.(웃음) 어째 법학 공부도 잘 맞았다. 물론 이를 갈면서 공부했다.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아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고 했다. 등록금 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나.
  “맞다. 법학과 공부는 문제가 아니었다. 십시일반으로 첫 학기는 등록했는데 그 다음부턴 방법이 없는 거다. 그래도 또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대학교 1학년 때 제6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한글로 <독립선언서>를 써 입선을 했다. 이것이 학교에 알려지자 당시 중앙대 총장이었던 임영신 박사님께서 다음 여름방학까지 독립선언서 10벌을 쓸 수 있겠냐고 직접 물어보셨다. 임영신 박사님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옷 안에 감춰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아마도 내 입선 소식에 옛날 생각이 나셨던 것 같다. 독립선언서 10벌은 지인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들었다.”
 
 -그때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바로 장학금을 달라고 요구한 건가.
  “총장께서 대우는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고 먼저 물어오셨다. 망설이지 않고 장학금을 달라고 했다.
 
 -한 땀 한 땀 독립선언서 10벌을 완성해나갔을 것 같다.
  “여름방학 내내 붓과 씨름하면서 10벌을 완성했다. 작업실로 배정받은 강의실 하나와 집에서 싸온 도시락 두 개와 함께. 학교에 가면 오전 8시 정도,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종일 쓰다보면 저녁 9시나 10시 사이가 되어 있곤 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강의실에 들어갈 때 두레박처럼 생긴 큰 마요네즈 깡통을 들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까지 열심히 했는데 장학금 못 받으면 억울할 것 같다.
  “10벌을 당시 학교의 재무를 보시던 분인 사무총장께 가져갔다. 그분이 내게 ‘총장님께 어떻게 말씀드리면 좋겠어?’하고 물었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하고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총장님께 독립선언서를 가져갔다. 관련 있는 학과의 교수님들을 불러 흠이 될 만한 걸 찾아보라고 하며 오탈자를 꼼꼼히 찾았다. 근데 흠이 있겠나. 당연히 없었을 거다. 흠 잡을 데 없이 정확하게 썼다는 것이 드러나자 총장님이 감동 받았다고 하더라. 그리고 후에 사무총장님이 말씀해주셨다. ‘이제 공부 잘해야 된다’고.”
 
 -서예가 4년 장학생을 만들어준 셈이다.
  “법학과를 다니면서도 서예를 계속 해야 했던 이유가 됐다. 법학을 배우면서 동시에 갈고 닦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임영신 박사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서예와 인연이 끊기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게 계속 다닌 대학은 어땠나. 지금의 대학 문화와는 역시 달랐을 텐데.
  “비슷한 점은 그때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분위기였다는 것. 학생운동이 사회의 주된 흐름이던 때는 내가 졸업할 때쯤이었다. 내가 4학년이었을 때 4·19혁명이 있었으니까.”
 
 -역시 추측해보건대 정하건 동문은 바른 대학생이었을 것 같다.
  “예상대로 수업 하나 빠지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술자리에 가서도 주변에 잘 맞춰주고. 대학 친구들과의 사이에서도 유별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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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至高至純 지고지순> 65x46cm‘더할 나위 없이 순결하다’는 뜻. 유하고 둥그런 글씨체가 독특하다.
 
 문인들이 언론지에 등단하듯이 서예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국전에 입선하거나 국전 추천작가가 돼야 했다. 정하건 동문은 대학교 1학년 때 <독립선언서>로 국전에서 입선하자 국전에 도전하는 것이 수월하겠거니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근 20년에 걸쳐 얻은 것은 입선만 15회. 결코 서예가의 길은 만만치 않았다.
 
 -졸업하고 바로 서예가의 길에 들어섰나.
  “일단 학년이 올라가면서 사법시험 공부는 단념하게 됐다. 현실을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시 패스할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 그 후 공무원도 2년 가까이 했는데 그만 뒀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나라에 이바지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게 서예였던 거다.
  “그렇다. 내가 잘하는 글씨 쓰기로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참 신기한 게 남들보다 국가관이 참 투철하다. 이북서 넘어온 대학생이어서 그런가. 서예를 업으로 삼은만큼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한국의 정신과 얼을 이어야겠다는 의지가 컸다.”
 
 -의지와는 다르게 초대작가가 되는 길은 험했다. 24년이 걸렸던가?
  “일단 국전 추천작가가 되려면 특선을 연속 3번하거나 전체적으로 4번해야 했다. 입선의 경우에는 12번에서 15번 가량을 해야 하고. 특선의 경우에는 흔히 하는 말로 줄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이걸 하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로비할 체질은 또 아니지 않나.
 
 -24년 동안 안 되면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주위 반응도 같았다. ‘조금만 머리를 숙이면 쉽게 할 수 있을 텐데’하며 걱정해줬지만 성격상 그러질 못했다. 그래도 밑천 하나 없이 1975년과 1978년에 문공부장관상(78년 당시 1등상)을 받으면서 결국 1981년부터 국전 추천작가가 됐다. 시간이 지나 보니 초대작가도 돼있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뭘. 부족했으니까 그동안 안 된 거지.(웃음)”
 
 -아니다. 운명인 거다. 대표작들을 미리 살펴봤는데 놀랄만한 것들이 많았다.
  “음…대표작이라고 하면 조계사 사적비를 많이 들더라. 9,000자에 달하는 대작이다. 사적비라는 게 절의 역사를 기록해놓는 중요한 비석인 데다가 비석에 글씨를 쓰는 것이라 긴장 속에서 작업했다. 삼복더위였던 2달 반 동안 개인 서재에서 문을 다 닫아 놓고 썼다. 숨을 안 쉬면 죽는다고들 하는데 다들 막연히 흘리는 말이지 않나. 나는 실감했다. 숨을 안 쉬면 정말 죽겠구나.”
 
 -호흡도 조절해야 하는 거라고 했는데 진짜인가보다. 
  “완벽주의 성격이 스스로를 혹사 시킨 셈이다. 선풍기를 틀거나 문을 열어 놓거나 숨 쉬고 싶은 대로 쉬면 결국은 이게 종이를 흔들어 놓고 만다. 바람 하나에도 달라지는 것이 붓과 획이라.”
 
 -제일 널리 알려진 휘호로 다들 ‘신토불이’ 제액을 꼽더라.
  “신토불이는 농협중앙회 30주년을 기념해서 1991년에 쓴 것이다. 한 번은 시골에 있는 지인이 전화가 와서 ‘난 송천 선생을 매일 봐요’라고 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저 휘호가 인쇄돼 전국의 농협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농산물 포장지에도 인쇄돼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매일 보는 것과 다름없는 거지. 많은 사람들이 봐주는 건 좋다. 그런데 계속 인쇄를 하면 글씨가 변한다. 복사하고 또 복사하다 보면 말이다. 나중엔 전혀 내 글씨 같지도 않더라.”
 
 -어쩐지 낯이 익더라. 해서체의 대가라는 말도 있던데.
  “해서체를 잘 쓴다고 평가 받기도 하지. 근데 스스로가 ‘나 잘 쓴다’하기는 어렵지 않나. 주위에서, 주위에서 대가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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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넉살> 34x34cm정하건 동문이 직접 쓴 시. 정하건 동문은 한글과 한문 혼용 서예 작품이 멋진 것으로 유명하다. 시에서 ‘잘 쓰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웃으며 쓰겠다’는 다짐이 엿보인다.
 
 그는 자신을 치켜세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대가’, ‘최고’, ‘5대 서예가’라는 말에도 자신은 아니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염치와 겸손을 저절로 배우게 되는 만남. 그 만남의 끝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서예 하는 분들은 자주 쓰는 문구 혹은 글귀가 있다더라.
  “워낙 많이 써서. 하나 선택하라면 지성무식(至誠無息)이 있겠다. 지극한 정성과 쉼 없는 배움, 또는 끊임없는 지극한 정성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매사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성을 쏟겠다는 의지가 담긴 문구다.”
 
 -혹시 후배들에게 들려줄 좋은 글귀는 없나.
  “유달영 박사의 시 <젊은 하루>를 소개한다.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이름 없는 들풀로 사라져 버림도/영원히 빛나는 삶의 광명도/젊은 날의 쓰임새에 달렸거니/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게나.’ 꼭 젊은 청춘들이 이 시를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다.”
 
 -지성무식을 쏟을 최종 목표가 있다면.
  “아시아 최고의 서예가가 되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다. 개인의 명예와 영달을 위해서라기보단 우리나라의 전통과 예술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서다.”
 
 -이미 최고 아닌가?
  “내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럼 이렇게 묻자. 몇 퍼센트 정도 도달했다고 생각하나?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의미까지 있겠나. 모교니까 ‘당연히’ 학교를 사랑하는 거지. 다만 궁금한 점이 있다면 학교의 교훈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가? 임영신 총장님께서 그 정신을 항상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정신을 아직도 기억하며 살고 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마음가짐으로 서예까지 하고 있으니 중앙대는 내게 큰 의미가 있다고 봐야겠다. 모교가 내게 유의미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어째 의미가 아주 크다.(웃음) 삶의 이정표를 건네준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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