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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판자촌 주치의 35년

관리자 | 조회 수 1739 | 2009.11.30. 10:58

배현정(의예 36) 전진상의원 원장

가난한 판자촌 주치의 35년



‘나보다 덜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서울 금천구 시흥2동 다가구 주택가에 자리잡은 전진상의원/복지관, 전진상약국.
전진상의원은 가정의학전문의가 가족주치의로서 환자의 가족 단위로 지속적이고, 포괄적이며 전인적인 치료와 상담, 질병예방 등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지난 1988년부터 호스피스활동을 시작하여 현재는 10병상 규모의 호스피스 전문 의료기관으로 지정받은 곳이기도 하다.
진료실에서 만난 원장 배현정 동문의 원래 이름은 ‘마리 헬렌 브라셔’. 벨기에 출신으로 약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질병과 고통에 자주 접했던 그는 ‘나보다 덜 부유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에 온 생애를 바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간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배 원장은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1972년 한국 땅을 밟았다.

1975년 시흥 판자촌에 복지센터 문 열어
한국에 온 후 2년 동안 한국말을 배운 그는 1975년, 이웃을 위해 봉사하려는 몇몇 A.F.I 회원들과 함께 팀을 조직하고, 고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에 따라 당시 3만5천여명의 빈민이 밀집된 시흥의 판자촌에 37평짜리 주택을 매입해 전진상가정복지센터를 개원했다.
이들은 지역과 유대를 맺으며 복지관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의사였던 김중호 신부를 중심으로 의료 봉사진을 구성해 가난한 이들의 진료에 나섰다.
“당시 한국은 경제발전의 시작단계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고, 결핵이나 홍역으로 죽는 경우도 허다하고 영양실조도 심각했습니다. 화상사고와 부스럼도 많았죠. 무료진료소를 열고 주말에 무료진료를 하는 한편 왕진을 다니며 가정간호에도 주력했습니다. 왕진을 다니면 서양인인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전문의료과목이 확대되면서 상주 의사가 필요하게 되었지만 외부에서 의사를 영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상주 의사에게 급여를 지불할 만한 재정적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회의를 통해 회원들 중 한 명이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고, 의대에 편입이 가능해 의사가 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배 원장이 의대에 진학하기로 했다.
“저는 간호사가 너무 매력적이고 좋았습니다. 의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고 공부도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중앙대 의대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던 김중호 신부의 소개로 중앙대 의대를 갔습니다. 당연히 떨어질 꺼라 생각해 아무 부담 없이 갔었는데 덜컥 편입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준비 없이 들어간 본과 1년, 어려운 한국말과 알 수 없는 의학용어 등으로 수업을 따라가는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좋은 친구들을 금방 사귀었어요. 편입당시 제가 35살, 친구들에 비하면 거의 할머니죠.(웃음) 친구들이 예습, 복습과 실습을 같이 하며 많이 도와줬어요. 1학기 마칠 때 시험에서 떨어지면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미련 없이 그만두려고 했는데 3과목이 재시험에 걸렸어요. 친구들의 도움으로 통과했고 그때부터는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했죠. 그때 친구들과 의대 동문들은 지금도 든든한 후원자입니다.”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려도 살 것 같은 기분”일 정도로 기뻤다는 그는 가톨릭의대에서 가정의학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가정의학전문의가 되었다. 전진상의원에서는 가정의학전문의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질병·가난의 악순환 깨기 위한 ‘의료사회사업’
전진상의원과 복지관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단순히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해주기보다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활동이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병이 들면 치료하는데 돈 들고, 가족들이 간호하느라 일을 못하기 때문에 더욱 가난해집니다. 그 가난을 차단해주는 것이 중요한 활동이기 때문에 사회사업가와 함께하는 ‘의료사회사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진상의원에서는 개인별 의료차트가 아니고 가족단위로 등록합니다. 환자가 오면 상담을 통해 가계도를 작성하고, 둘러싼 환경을 살펴 가정내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조손가정의 어린이를 위해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배 원장은 외래환자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중환자들을 위한 방문 진료를 중요하게 생각해 20여 년 전부터 매주 목요일은 왕진 진료를 실시하며 24시간 응급상황에 대응하고 있다. 환자 뿐 아니라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담하는데도 오랜 시간을 투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와
전진상의원은 1996년부터 가정 호스피스 완화치료를 시작했다.
“우리가 일을 시작한 초기부터 늘 생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환자들을 직면해왔고 그래서 가정 호스피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호스피스 활동은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돌봐 환자가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키고, 남은 생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준다. 전진상의원은 현재 10개의 병상을 갖추고 가정에서 간병이 어려운 상황이나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경우에 입원이 가능하다. 상태에 따라 본인의 의지대로 퇴원하거나 가정을 왕래할 수도 있다.
“말기환자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산다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2,3주밖에 못 산다고 했던 사람들이 6개월씩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가 치료방법을 선택할 수 있고 환자 자신이 마지막까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몇몇 환자들은 저에게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은 저에게 감동과 고통과 존재의 신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한국에 온지 37년이 된 배 원장은 시흥동 주민들과 함께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었다. “함께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보람을 느낀다”면서도 “후회는 없지만 또다시는 못할 것 같다”는 말로 그간의 어려움을 내비친다.
“중앙대는 항상 고향 같고, 학교에 갈 때마다 기분이 좋다”는 배 동문은 1996년 중앙대 의대에서 받은 ‘의와 참의 중앙의료인상’이 가장 기쁘게 받은 상이며, 후배들이 동생들 같다고 미소 짓는다.
배 동문은 11월25일 서울아산병원 아산교육연구원 강당에서 '아산상'을 수상하고 상패와 상금 1억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