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경제78) 칼럼]
노무현정부 시즌2는 아닐 테지만


입력 2017-06-18 17:38

“반미주의자면 어떤가?” 2002년 9월 11일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영남대 강연에서 한 말이다. 이 발언은 논란을 불렀다. 그해 6월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효순·미선 사건이 벌어진 직후인지라 진보진영은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반면 보수진영은 노 후보의 반미성향과 그 위험성을 두고두고 비난했다.

미디어가 ‘반미면 어때’라고 줄여 전한 그 말은 당시 강연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그리 특별한 내용도 아니었다. 거두절미하고 ‘반미’란 말이 앞뒤 없이 홀로 내달리면서 사태가 엉뚱하게 떠밀려갔다.

그날 강연에서 노 후보는 그 발언 직후 곧바로 정정했었다. “반미주의자면 어떤가, 이건 좀 곤란합니다. 여러분은 관계가 없는지 몰라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반미주의자라는 것은 국익에 큰 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물론 이 후속 발언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미국관이 무엇이었든 적어도 그는 반미의 부정적 함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역시 ‘국익’ 차원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늘 반미가 따라붙었다. 잘못 알려진 이미지 탓이 크다.

더불어 새로 등장한 문재인정부에 대해 ‘노무현정부의 시즌2’로 의심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반미 정권의 시즌2’가 아닌지 지켜보는 것이다. 노무현정부 때 비서진이 새 정부의 청와대 비서진으로 다시 컴백하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서훈·조명균씨가 각각 국가정보원장과 통일부 장관으로 중용된 것도 그리 보이는 이유다.

이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이번 대선 공약집 ‘나라를 나라답게’에 담긴 대북·외교안보정책 방향은 과거 노무현정부가 강조했던 대북포용·자주·균형외교의 데자뷔 같다. 또 문 대통령은 지난 6·15 17주년 기념사 끝자락에서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과 노무현정부의 (남북)평화번영정책’을 오늘에 맞게 계승·발전시키겠다고 단언했다.

이명박·박근혜정부가 9년 동안 지속해온 대북 압박정책에 대해 분명하게 결별을 고하는 내용이다. 대단히 의미 있는 반전이다. 핵 폐기를 전제로 한 그간의 조건부 남북협력론은 무기력했고 남북 간 공식·비공식 접점마저도 소실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가 남북관계 복원을 위해 대화에 방점을 두겠다는 것은 김대중·노무현정부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진보정권의 시즌2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 한 달 남짓의 행보에서 전략가 문재인을 읽을 수 있었음을 감안하면 단순한 시즌2는 아닐 것으로 본다. 어떻든 문 정권은 시즌2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선 대외환경이 노무현정부 때와 전혀 다르다. 북한은 이미 5번의 핵실험으로 핵을 과시하고 있어 대화에 아예 응하려 하지 않을 터다. 자신을 낮추고 때를 기다렸던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중국은 이제 노골적으로 굴기(?起)를 앞세우고 있어 한·중 관계도 녹록지 않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 역시 오로지 자국의 이익 관철에만 혈안이다. 한반도의 현실은 10여년 전보다 훨씬 더 그악스러워졌다.

무엇보다 노무현정부는 그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정치권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반미로 알려졌지만 노무현정부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으며, 진보진영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협력해 파병했고 제주도에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했다. 모두가 국익에 충실한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낮았다. 문재인정부가 노무현정부 시즌2를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문재인정부는 높은 지지율에 기대어 이상론을 펴려고만 말고 철저한 실천구상과 함께 구체적인 비전을 세우고 더 많이 설득해야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요, 아무리 선한 의지라도 현장에 육화(肉化)되지 못하면 무망할 뿐이다.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첫 번째 허들로 다가왔다.

조용래(경제78)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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