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마음 잇는 길로 희망 노래하고 싶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그는 길에서 길을 찾는다. 길은 추억의 시이자 희망의 노래다. 다시 말해 그에게 길은 삶의 여정 그 자체다.
길의 화가 이영희(59) 씨. 평생 동안 화폭에서 길을 찾아온 그가 이번엔 북녘의 고향길을 붓으로 옮겨냈다. 그리고 개인전을 통해 일반에 선보였다. 이번 '북녘의 땅-고향 찾아가는 길'은 지난달 28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좁은 의미로 이씨의 고향은 북한땅이 아니다. 충남 천원 출신으로 중앙대를 나온 그에게 북한은 낯설다면 낯설다. 하지만 그곳도 엄연히 우리의 산하다. 또 그가 줄기차게 추구해오고 있는 흙길과 흙언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림 소재의 보고(寶庫)다.
"이렇게 대규모 전시회를 가져보기는 2003년에 이어 5년 만입니다. 북한 땅을 직접 밟고 얻은 감성을 처음으로 화폭에 옮겨냈다는 점에서 감회가 커요. 전시 제목이 왜 '고향 가는 길'인지는 작품을 보시면 금방 아실 겁니다."
작품 41점 중 북한 관련 작품은 37점이나 된다. 이씨는 이 작품을 위해 모두 네 차례 방북했다. 2002년 금강산 관광을 한 데 이어 2006년 6월에는 평양과 묘향산을 찾았고, 지난해 2월과 6월에는 강원도 고성의 시골 땅을 거푸 돌아다녔다.
지난해 6월에는 중국 땅을 통해 북한을 건너다봤다. 다롄과 단둥을 거쳐 두만강까지 여행하며 산하의 숨결을 들었다.
북한의 시골길을 그리기로 결심한 것은 2002년 금강산 관광 때였다. 온정리 앞의 야산 오솔길을 걸으면서 한국적 토속미가 그대로 살아 있는 흙길의 옛 정취에 홀딱 빠져버린 것이다. 나무가 없어 헐벗은 산야 또한 남한의 1950-60년대 풍경 그대로였다.
"남쪽 땅에는 옛길이 거의 없습니다.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모두 사라진 것이지요. 도로는 직선화하면서 포장됐고, 정겨운 언덕밭도 대부분 자취를 감췄습니다. 잃어버렸던 옛길과 옛언덕이 그곳엔 살아 있더라구요.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구불구불한 흙길과 흙언덕은 편안함과 후련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막힌 게 없어 시야 또한 확 트인다. 자연이 하잔 대로 이리저리 굽어지는 밭들도 생명이 사는 안온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추억과 그리움 속에 남아 있는 마음의 고향길인 것이다.
그는 왜 그토록 '길'에 연연해할까? 길 중에서도 흙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씨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길은 삶의 여정에 대한 은유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함께 길도 태어났습니다. 그 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고, 그 길을 따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그 길은 삶의 애환으로 점철돼 있어요. 언덕길에는 고단한 인생사가 발자국처럼 무수히 박혀 있구요."
이씨는 결국 희망을 말하기 위해 고단함을 표현한다. 언덕길 너머로 환히 드러나는 하늘의 빛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시간 속의 기다림이자 종교적 경건성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작은 종전의 작품과 약간 다른 화풍을 보이고 있다. 화면을 절반으로 나눠 윗부분은 간명한 색채의 하늘을, 아랫부분은 미세한 표현의 땅을 표현해왔으나 북한 작품은 배경에 해당하는 윗부분까지 가급적 상세히 묘사해낸 것이다.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에게 고향 모습을 최대한 자세하게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묘사의 세밀함에 치중했습니다. 실제 풍경을 그대로 담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도록 한 거지요. 고향이 북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모습, 그 풍경은 중장년층 이상에겐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니까요."
이씨의 길찾기는 계속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화법을 고수하는 그는 오로지 붓에 의지해 화폭에 자신의 심상을 그려나갈 것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붓터치로 삶의 무게와 깊이를 더해가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림 속의 길이나 삶 속의 길이나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말한다. 고단함을 견디고 희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인생사라면 기쁜 마음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기회가 되면 북한에서도 전시를 하고 싶습니다. 작품들이 남과 북을 잇는 통일의 길이 된다면 더욱 좋구요. 이제 시작입니다. 할 수만 했다면 북한 땅을 자주 밟아보고 싶어요. 막힌 마음의 길을 여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거죠."